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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복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501068
한자 平常服
영어공식명칭 Everyday Clothes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무주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진명숙

[정의]

전라북도 무주 지역 주민들이 일상생활이나 작업할 때 입는 의복.

[전통 시대]

고려 시대 왕과 관리는 평상복으로 백저포(白紵袍)에 검은색 건[鳥巾]을 썼다. 조선 시대 왕은 상투관, 저고리, 바지, 답호(褡𧞤), 철릭[帖裹], 두루마기 등을 입었다. 사대부는 평상복에도 복건(幅巾), 방관(方冠), 정자관(程子冠), 동파관(東坡冠) 등을 취향에 따라 썼다. 조사(朝士)는 당건(唐巾)을 썼으며 외출 시에는 모두 갓을 썼다. 신은 당혜(唐鞋), 운혜(雲鞋)를 신었다. 조선 시대 궁중의 여인들은 저고리, 치마, 회장저고리 등을 착용하였으며, 왕비는 당의(唐衣)를 입었다. 양반가 여인들은 저고리, 치마, 배자(褙子) 등을 입었다.

조선 왕조에는 1449년(세종 31) 정월에 내린 금제(禁制)에 “서인(庶人), 공상천예(工商賤隸)는 직령(直領), 액주름[腋注音], 철릭을 통착한다.”라고 하여 직령, 액주름, 철릭이 서인복으로 지정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까다로운 금제로 인해 조선 민족이 백의민족으로 지칭될 만큼 평민들의 복식 문화는 발달하지 못하고, 염색이나 문양도 다양하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

일반 평민 남자는 평상복으로 바지와 저고리를 입었다. 바지에는 행전을 치기도 하고 행전이 없으면 무릎 아래에서 끈으로 바지를 매어 활동하기 편하게 하였다. 기혼자는 상투를 틀고 흑립(黑笠)[칠립(黑笠)]을 썼으며, 미혼자는 머리를 뒤로 땋아 늘였다. 여자들의 평상복은 저고리와 치마였다. 평상복은 일상생활에서 입는 옷으로 노동복과 크게 구분되지 않는다. 다만 오래 입은 후 헌옷이 된 평상복을 대개 노동복으로 사용하였다.

[근현대]

개화의 영향으로 서양의 복식 문화가 들어오면서 양복 착용이 점차 확산되었다. 1960년대 경제 개발이 시작되면서 의복의 대량 생산 체제가 이뤄지면서 기성복 세대가 열리며 평상복은 급변하게 되었다. 무주 문화원에서 발간한 『무주의 옛 사진전』[2014]을 살펴보면 근현대 무주 지역 주민들의 평상복을 엿볼 수 있다. 1904년(고종 41) 옛 대덕사와 초기 증산 교회 앞에서 찍은 사진들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한복을 입고 있었다. 1940년 무풍 초등학교 운동회에서도 아이들은 한복 차림이었다. 1958년 무주 친목 여성회 창립 기념 때 여성들은 모두 한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 여성의 평상복은 여전히 치마저고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남성 평상복은 서구의 옷 문화가 안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60년 한 결혼식 사진에서 함진아비와 친구들은 양복 차림이었고, 1963년 설천면 사무소[현 설천면 주민 자치 센터] 구천동 출장소 앞에서 사진을 찍은 남자들도 대부분 양복, 티셔츠, 와이셔츠, 제복 등을 입고 있었다. 1970년대 학생들의 옷차림에서도 서양의 기성복이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립 민속 박물관이 2008년 발간한 『잿들, 산 위에 들을 일구다-무주군 적상면 북창리 내창 마을』을 보면 무주 지역 주민의 평상시 의생활을 엿볼 수 있다. 북창리 내창 마을 사람들의 옷은 도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남녀 구분 없이 일상복은 편안한 상의와 하의를 입었으며, 일상복이 작업복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 특별히 구별은 되지 않는다. 겨울은 다른 지역보다 춥기 때문에 부녀자들은 상의 위에 조끼 같은 것을 걸쳐 입어 보온을 유지하였다. 또 양말보다는 버선을 즐겨 신었는데, 합성 섬유 재질이어서 따뜻하다고 한다. 여름에는 일상적으로 반팔 옷을 입지만, 밭에 나가 일할 때는 햇빛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편한 바지와 긴 소매의 긴팔 옷을 입는다. 남녀 모두 주로 밭일을 하므로 신발에 흙이 들어가는 것을 막고자 고무 장화를 신는다. 초등학교 아이들은 학교 갈 때 입는 옷과 일상복이 크게 구별되지 않으며, 중학교와 고등학교 학생들은 교복을 착용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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