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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500914
한자 茂朱鄕校
영어공식명칭 Mujuhyanggyo Confucian School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단천로 135[읍내리 264-6]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유연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398년연표보기 - 무주향교 건립
이전 시기/일시 1692년 - 무주향교 서쪽으로 이건
이전 시기/일시 1834년 - 무주향교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단천로 135[읍내리 264-6]로 이건
개축|증축 시기/일시 1876년 - 무주향교 대성전, 양무, 양재 중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884년 - 무주향교 명륜당, 홍문 중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897년 - 무주향교 대성전 중수[1897]
문화재 지정 일시 1984년 4월 1일 - 무주향교 대성전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03호로 지정
현 소재지 무주향교 -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단천로 135[읍내리 264-6]지도보기
성격 향교
양식 맞배지붕[대성전]|팔작지붕[명륜당]|맞배지붕[동무·서무]|맞배지붕[동재]|팔작지붕[양사재]
정면 칸수 3칸[대성전]|5칸[명륜당]|3칸[동무·서무]|4칸[동재]|4칸[양사재]
측면 칸수 2칸[대성전]|2칸[명륜당]|1칸[동무·서무]|2칸[동재]|3칸[양사재]
소유자 향교 재단
관리자 유근춘

[정의]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읍내리에 있는 조선 전기 향교.

[위치]

무주향교(茂朱鄕校)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읍내리 264-6번지[단천로 135]에 있다. 무주 군청에서 주계로를 따라 가다 보면 길 끝 단천로와 합쳐지는 지점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변천]

1398년(태조 7) 현사(縣舍)의 북쪽에 창건되었다. 처음 건립된 향교에 호랑이가 나타나 해를 입히자, 1692년(숙종 18) 당시 무주 부사 김몽신이 향로산 서쪽으로 이전하였다. 그러나 이곳은 지대가 습해 60여 년 동안 10여 차례나 수선해야 하였다. 1830년(순조 30) 부사 이헌승이 이건에 착수하여 1834년 부사 이광승이 현 위치에서 준공하였다. 그 후에도 1876년(고종 13) 부사 이응우(李膺愚)가 대성전을 비롯한 양무(兩黛)[동무와 서무]와 양재(兩齋)[동재와 서재]를 전면 중수하였다. 1884년(고종 21) 부사 조준호(趙駿鎬)가 명륜당과 홍문을, 1897년(고종 34) 군수 조병유(趙秉瑜)가 대성전을 중수하였다. 무주향교는 교육 기관의 역할을 하였으나,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교육의 기능이 사라지게 되었다.

1834년 김속(金涑)이 쓴 향교 이건기(鄕校移建記)를 통해 무주의 열악한 상황을 알 수 있다. 무주는 지리적 위치로 인해 사대부가 부족하고 무주향교 건물도 방치되어 유교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무주에 부임한 수령들에 의해 무주향교가 확장 또는 이건되거나 중수되었다.

[형태]

무주향교는 하마비, 내외삼문, 명륜당, 동재(東齋), 동무(東廡), 서무(西廡), 대성전, 양사재, 무주군 관광 안내소로 이루어져 있다. 서재(西齋)는 화재로 소실되었다. 전면에 강학 공간, 후면에 배향 공간으로 배치되어 있다. 강학 공간인 명륜당이 향교 우측 정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배향 공간과의 사이에 동재와 서재가 있다. 배향 공간은 내삼문을 거쳐 대성전과 동무, 서무가 위치하고 있다. 양사재는 좌측 공간에 자리 잡고 있다. 대성전은 맞배지붕 양식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명륜당은 팔작지붕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이다. 양사재는 팔작지붕으로 정면 4칸, 측면 3칸이다. 동무와 서무, 동재는 맞배지붕이며 각각 정면 3칸과 측면 1칸, 정면 4칸과 측면 2칸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현황]

대성전의 중앙에 공자를 비롯한 제자 4명, 동벽과 서벽에 동국 18현(東國十八賢)을 모셨다.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봉심제를 올리고, 매년 봄과 가을 상정일에 석전대제(釋奠大祭)를 올린다. 기존에 동무와 서무에 18현을 모셨으나 1985년부터 대성전으로 옮기고 석전대제 체험용 의복과 제기 용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명륜당에서는 향교 일요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향교는 전통 시대 지방 교육 기관으로 지역 내의 학술을 선도하는 곳이었다. 현재도 지역 내 많은 학자들의 회합 장소로 활용되고 있으며, 일요 학교를 통해 교육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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