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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500892
한자 儒敎
영어공식명칭 Confucianism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단천로 135[읍내리 264-6]|안성면 평장길 79[죽천리 1716-3]|사전1길 24-13[사전리 711-2]|별묘길 28[진도리 948-3]|무풍면 북리길 40[현내리 북리마을 167]|지성길 119[지성리 733-1]|철목길 120-2[철목리 849-2]|철목1길 16[철목리 430]|한재길 4-8[은산리 1166]|설천면 라제통문로 50-12[소천리 450-9]|구천동로 847[삼공리 366-6]|소천리 1047|기곡1길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398년 - 무주 향교 설립
관련 장소 위치 무주 향교 -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단천로 135[읍내리 264-6]지도보기
관련 장소 위치 죽계 서원 -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평장길 79[죽천리 1716-3]지도보기
관련 장소 위치 백산 서원 -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북리길 40[현내리 북리마을 167]지도보기
관련 장소 위치 분양 서원 -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지성길 119[지성리 733-1]지도보기
관련 장소 위치 덕천 서원 -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라제통문로 50-12[소천리 450-9]지도보기
관련 장소 위치 도산 서원 -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사전1길 24-13[사전리 711-2]지도보기
관련 장소 위치 가일사 -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구천동로 847[삼공리 366-6]지도보기
관련 장소 위치 도남사 -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별묘길 28[진도리 948-3]지도보기
관련 장소 위치 백촌사 - 전라북도 무주군 부남면 부남로 1777-3[가당리 산77]지도보기
관련 장소 위치 설호사 -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 1047 지도보기
관련 장소 위치 신안사 -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기곡1길 11-5[기곡리 300]지도보기
관련 장소 위치 세덕사 -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철목길 120-2[철목리 849-2]지도보기
관련 장소 위치 죽림사 -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철목1길 16[철목리 430]지도보기
관련 장소 위치 덕천사 -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이남3길 5[소천리 457-4]지도보기
관련 장소 위치 한천사 -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한재길 4-8[은산리 1166]지도보기

[정의]

전라북도 무주군에서 이루어지는 공자의 사상과 관련된 학문과 의례 및 활동 일반.

[개설]

유교(儒敎)는 공자(孔子)와 맹자(孟子), 주희(朱熹) 등 유학 선구자들의 정치사상과 학문 수양, 생활 의례 등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현세적 사상이다. 우리나라에 유교가 전래된 것은 한자(漢字)의 도입 시기와 일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교는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이 말해 주는 것과 같이 삼국 시대 이후 정치사상과 이념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과거제가 실시되면서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까지의 유학은 훈고학(訓詁學)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고려 말에 성리학(性理學)이 도입되면서 하나의 철학 이념으로 발전하였으며, 개인 수양과 생활 의례가 중시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이 국가 통치 이념이 되어 사회생활의 모든 면을 규정하는 틀로 작용하였다. 무주 지역에도 향교(鄕校), 서원(書院), 사우(祠宇)가 건립되면서 본격적으로 유학이 보급되고 발전해 나가게 되었다.

[삼국 시대~고려 시대]

유학은 한자가 도입되면서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백제에서도 오경박사(五經博士) 등을 두면서 유학이 발전하였고, 이것은 지방으로까지 확대되었을 것이다. 「임신서기석」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에서도 유학이 발전하였다. 무주 지역은 백제와 신라의 접경이 되어 양쪽에서 중시하던 지역이므로 중앙의 학문 등이 전파되었을 것이나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고려 시대에 호남 유학은 부안 출신의 김구(金坵)[1211~1278]가 원나라에 서장관(書狀官)으로 다녀온 후에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영향으로 전라도 지역의 유학이 발전하였을 것이며, 무주 지역도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무주 지역은 외진 지역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유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이들을 통해서 무주 지역의 유학이 발전하였을 것이다.

[조선 시대]

유교는 조선 시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보급되었다. 유교 문화 정책에 따라 관혼상제(冠婚喪祭) 등 유교 의례가 전반적으로 시행되었다. 또한 경서(經書)를 대량으로 간행하여 보급하고, 한글을 창제하여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등을 배포하여 대중의 교화에 힘썼다. 조선 중기에는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등 뛰어난 학자들이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1398년(태조 7)에 무주 향교(茂朱鄕校)가 설립되면서 유학이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진주 하씨(晉州河氏) 등 명문가의 후손들이 무주 지역에 들어와 생활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유학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유교의 영향은 충신과 열사의 의거로 나타났다. 무주 지역에서도 충의 정신에 따라 의병이 일어났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무주에 있는 적상산(赤裳山)에 사고가 설치되었다. 적상산 사고(赤裳山史庫)는 1610년(광해군 2) 순안어사(巡按御史) 최현(崔睍)과 무주 현감 이유경(李有慶)의 요청에 따라 사관을 적상산에 보내 땅 모양을 살피게 하고 적상산성을 수리하게 하였다. 1614년(광해군 6) 적상산성 안에 실록전(實錄殿)을 건립하였다. 4년 뒤인 1618년(광해군 10) 9월부터 실록이 봉안되기 시작하였다. 1633년(인조 11)까지 묘향산 사고의 실록을 모두 이곳으로 옮겨서 보관하였다. 1641년에는 선원각(璿源閣)을 건립하고 『선원록(璿源錄)』을 봉안하여 적상산 사고는 완전한 사고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처럼 적상산 사고가 설치되면서 무주의 유학이 더욱 발전하게 되었을 것이다.

[개항 이후]

개항 이후 신식 교육이 밀려오자, 무주 향교는 많은 수난을 겪게 되었다. 일본에 의한 학제 변경으로 인해 향교를 사립 학교로 전환하고자 하였으나, 공립 학교가 설치되면서 향교 유림들은 관리하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동쪽으로 수십 보(步) 떨어진 곳에 있는 양사재 역시 학생들의 기숙사(寄宿舍)로 변하였다. 하지만 무주 향교도 다른 향교들과 마찬가지로 문묘 종사(文廟從祀)를 이어 나갔다. 또한 무주 지역에서도 생활 속에서 행해지던 제례와 의례는 유교식으로 계속 이어졌다.

해방 이후 1946년 성균관과 유도회(儒道會)가 창립되었다. 이때 유림 조직은 성균관, 유도회, 재단 법인 성균관으로 삼원화되었다. 재단 법인 성균관 아래에 각 시도별로 향교 재단이 있고, 그 아래에 전국 235개의 지방 향교가 있었다. 이때 무주에서도 성균관장의 임명을 받는 무주 향교의 전교(典校)와 장의(葬儀)가 임명되어 석전대제(釋奠大祭)와 삭망분향례(朔望焚香禮) 등을 시행하게 되었다. 향교 안에는 의전·교화·총무·조직·재정·선전 등의 부서를 두어 활동하고 있다. 현재도 무주 향교는 현대에 맞는 한자 교육, 예절 교육 등의 유교 교육을 다양하게 시도하고 있다.

[무주의 유교 교육 유적]

현재 무주에는 무주 향교가 있다. 현존하는 서원으로는 죽계 서원(竹溪書院)·백산 서원(柏山書院)·덕천 서원(德川書院)·분양 서원(汾陽書院)·도산 서원(道山書院)이 있으며, 복설되지 못한 서원으로 주계 서원(朱溪書院)이 있다. 사우로는 가일사(加一祠)·도남사(道南祠)·백촌사(白村祠)·설호사(雪湖祠)·충의사(忠毅祠)·신안사(新安祠)·서씨세사(徐氏世祠)·세덕사(世德祠)·유천사(裕川祠)·죽림사(竹林祠)·덕천사(德川祠)·한천사(寒天祠)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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