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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500358
한자 現代
영어공식명칭 Contemporary Times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무주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임혜영

[정의]

1945년 광복 이후 현재까지의 전라북도 무주 지역의 역사.

[개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무주군은 미국과 소련의 분할 점령으로 인한 분단과 6·25 전쟁, 전쟁의 상흔을 딛고 이루어 낸 경제 발전 등 한국 사회의 성장 및 발전과 그 궤적을 함께하였다.

[행정 구역 개편]

1895년(고종 32) 지방 관제를 23부(府), 331군(郡)으로 개편함에 따라 무주 지역을 관할하던 무주 도호부(茂朱都護府)가 폐지되고 전라도 남원부 무주군으로 바뀌었다. 다음 해인 1896년 전라도를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로 나누면서 전라북도 무주군으로 개편되었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이 단행되었는데, 이때까지 무주군에서 관할하던 12개 면과 금산군에 속하였던 부남면(富南面)을 무주군에 편입한 뒤 6개 면으로 개편하고 행정 지명은 전라북도 무주군으로 하였다.

그 후 광복과 6·25 전쟁 등을 겪으면서도 별다른 변동이 없었으나, 1963년 5월 「면 출장소 설치 조례」가 공포되면서 같은 해 6월 적상면(赤裳面) 상곡 출장소(裳谷出張所), 설천면(雪川面) 구천 출장소(九千出張所)가 개소되었다. 1975년 4월에는 부남면(富南面) 가정 출장소(柯亭出張所)가 설치되었다. 1979년 5월 1일 전국의 군청 소재지 면이 읍(邑)으로 승격됨에 따라 종전의 무주면이 무주읍으로 승격되었다. 그 당시 무주군의 행정 구역은 1읍, 5면, 3출장소, 48리였다. 이후 1998년 11월 출장소가 폐지되어 2016년 12월 31일 현재 행정 구역은 1읍[무주읍], 5면[무풍면, 설천면, 적상면, 안성면, 부남면], 48법정리이다.

[광복 이후 사건들]

1. 덕유산 빨치산과 무주군

빨치산은 프랑스어로 ‘동지’ 또는 ‘당파’라는 뜻의 ‘파르티(parti)’에서 유래한 말로 비정규군을 일컫는다.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빨치산이라고 하면 6·25 전쟁 전후 지리산 부근을 근거지로 활동했던 공비(共匪)를 말한다. 사회주의를 신봉했던 사람들이 1945년 광복 이후 미군정의 박해를 피해서 산으로 숨은 것이 빨치산의 시작이라고 하며, 여순 사건(麗順事件)을 겪은 후 세력이 확장되었다고 한다.

무주 지역에 빨치산이 출현한 것은 1949년으로 들어서이다. 여순 사건의 주동자 김지회(金智會)는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에 쫓겨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산악 지대를 전전하다 1949년 초 반란군 약 300여 명을 이끌고 덕유산(德裕山)으로 들어와 토옥동(土玉洞) 골짜기에 거점을 마련하고 보급 투쟁에 나섰다. 이 정보를 입수한 무주 경찰서에서는 군경(軍警) 합동 토벌대를 구성하고 3월 23일을 기하여 토벌 작전을 전개, 적의 주력을 패주시켰다. 덕유산에 신록이 한창 피어나던 1949년 5월 무주 경찰서에서는 토옥동 공비 소탕 작전 때 미처 도망가지 못한 김지회 부대의 패잔병이 덕유산 냉천곡(冷泉谷)에 잔류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송석조(宋錫祚) 서장의 지휘에 따라 안성 지서(安城支暑) 서종석(徐鍾錫) 주임이 유격대를 조직하여 작전을 전개, 공비를 패주시켰다. 두 차례 패전을 당한 빨치산은 8월 하순쯤 ‘인민 유격대 지리산 지구 전투 사령부’라는 거창한 이름과 함께 대부대를 이끌고 덕유산으로 들어와 기회를 노렸다. 그러면서 산아래 마을로 출몰하여 양식과 소·돼지 등을 약탈하였다. 이에 국방부에서는 덕유산 지구 공비토벌의 심각함을 인식하고 군부대 파견을 결정, 안성면에 주둔시켰다.

그 이후 무주 경찰서 유격대는 군부대와 함께 연일 덕유산 토벌 작전에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여순사건의 김지회 부대 300여 명이 덕유산에 모여 무주 읍내 습격을 계획한 후 적상산(赤裳山)에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경찰은 10월 5일 경찰관 40명과 적상면 청년 400여 명을 동원하여 토벌대를 편성하고 적상산을 포위한 다음 토벌 작전에 임하였다. 그러나 반란군의 그림자 하나도 찾지 못한 채 회군하였다. 그런데 하산한 대원들을 점검하던 중 경찰관 한 명이 행방불명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경찰은 그다음 날 면민 1,000여 명을 대거 동원하여 다시 산으로 올라가 수색 작전을 벌였고, 호국사 부근 샘주골에서 경찰관 배동진(裵東鎭)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그때 무주 경찰서 사찰 주임이 호국사(護國寺)가 반란군의 은신처라며 호국사 법당에 불을 놓아 태워 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다음 날인 10월 6일은 추석이어서 그날 밤, 무풍면 소재지에서는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소인극(素人劇)과 민속놀이로 명절을 즐기고 있었다. 그때 김지회 부대가 민가에 침입하여 곡식을 약탈해 가면서 무풍면 사무소를 비롯한 무풍 경찰 지서와 금융 조합 무풍 지소 등 주요 기관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다. 11월 초순에는 안성면 죽천리 명천 마을에서 덕유산으로 오르는 원통사(圓通寺) 계곡에 은신하고 있던 반란군을 토벌하던 중 신라 때 창건된 고찰 원통사가 소실되었다.

지리산과 덕유산을 오가며 가을을 지낸 반란군은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 더욱 대범하게 보급 투쟁을 전개하였다. 11월 초순 덕유산에 거점을 두고 있던 반란군은 무주 읍내를 습격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요로에 병력을 매복시켰다. 11월 5일 날이 어두워지자 대병력을 갖춘 김지회 부대가 무주 읍내를 향해 이동하였다. 자정 무렵 무주 읍내 전역을 포위하고 무주 초등학교 뒷산에 지휘 본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한 발의 총성을 신호로 반란군의 총소리가 사방에서 쏟아졌다. 뒤이어 무주 경찰서 사이렌대에서 울려 퍼지는 비상 사이렌 소리가 뒤섞이며 온 시가지는 삽시간에 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무주 읍내 시가지에서는 경찰서 망루대에서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쏘아 대는 기관총 소리가 계속되었다. 어둠이 걷히면서 반란군 부대는 부상자들을 이끌고 산속으로 패주하였다. 이후에도 무주 지역은 빨치산의 은신처로 이용되던 지리산과 연계된 덕유산이 있었기에 여러 차례 공방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었다.

2. 6·25 전쟁과 무주군

6·25 전쟁 기간 낙동강 전투에서 패하고 쫓기는 인민군과 의용군 패잔병이 퇴로와 숨을 곳을 찾아 무주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반공 청년 10여 명은 동지들을 규합하여 ‘반공 투쟁단’을 조직한 후 치안 활동을 하였다. 1950년 9·28 수복 후에도 후퇴하지 못한 공비들이 출몰하여 산간 지역 주민들은 여러 만행에 시달렸다. 이에 애국심에 불타던 이 고장 출신 청년·학도들은 무주 중학교 2학년, 3학년을 중심으로 선·후배 40여 명을 규합하여 학도대를 조직하고 지역 치안 유지와 미수복 지구 수복을 위한 공비 토벌에 앞장설 것을 다짐하였다.

그때 대한 청년단 김동헌(金東憲) 단장이 11월 25일 무주 경찰 서장으로 부임해 온 김두운(金斗云) 서장과 만나, 이미 조직된 학도대를 전투대로 편제하여 운용할 것을 논의하고 전기 학도대와 협의하여 2개 소대의 ‘학도 의용대’를 창설하였다. 학도 의용대는 경찰에게서 무기를 지급 받고 무주에 주둔하고 있던 전투 경찰 병력과 공조하여 주요 지역 경계 근무와 미수복 지역 수복을 위한 공비 토벌 작전에서 수많은 공적을 남겼다. 적상면 방이리 배골에 출동하여 빨치산과 첫 전투를 벌이면서 김일성 대학교 출신 정치 공작 대원[여성] 1명을 포함하여 3명의 빨치산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겨울철 보급 투쟁을 위해 자주 출몰하는 공비들을 토벌하기 위해 경찰 병력과 합동 작전을 벌였고, 미수복 지역인 부남면을 수복하는 등의 전과도 올렸다.

[1970년대 이후 이농 현상과 무주]

우리나라에서 이농(離農) 현상은 1960년을 전후하여 간헐적으로 나타나다 1970년대 후반 들어 눈에 띄게 증가하였다. 무주군 지역도 예외는 아니어서, 대체적인 인구 변동을 보면 1970년 7만 5250명, 1975년 7만 132명, 1978년 6만 5102명으로 감소 현상을 보인다. 그러나 1991년 3만 5182명, 1995년 3만 2320명, 2000년 2만 9254명, 2015년 2만 5470명으로 대폭 감소하였다. 이러한 인구 감소를 막기 위한 정책 중 하나로 무주군에서는 예비 귀농, 귀촌인을 위한 상담을 비롯하여 다양한 귀농, 귀촌 정책을 마련하고 지역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지방 자치 시대 이후 무주]

지방 자치제 실시 후 무주군에서는 1996년 6월 한국 행정 연구원에 ‘무주군 행정 내부 전반에 대한 조직 진단’을 의뢰하였고, 그해 11월 제출받은 결과물을 토대로 조직을 개편하였다. 무주군에서 조직 진단을 의뢰한 것은 무주군의 발전 목표와 전략에 따른 중·장기 군정 방향과, 여기에 기초한 행정 내부 조직·인력·기능의 합리적인 배분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무주군의 조직 및 인력 관리상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 후 1997년 무주·전주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대비하고 성공적인 대회 개최를 위한 한시 기구로 ‘U대회 상황실’이 설치되었다. 1997년 조직 개편을 보면 본청은 1실, 12과, 1한시 기구[U대회 상황실], 48계였다.

무주군의 대표적인 지역 축제로는 무주 반딧불 축제가 있다. 청정 환경의 대표적인 지표[Barometer] 곤충인 ‘반딧불이’를 되살리자는 인식에서 출발한 무주 반딧불 축제는 깨끗한 무주를 부각시키기에 충분한 축제이다. 1997년 8월 7일부터 10일까지 4일간 열린 제1회를 시작으로 2016년 20회를 맞이하였다. 이 축제는 자신의 건강 및 행복과 더불어 지구 환경과 주위 사람들의 행복도 함께 배려해서 행동하는 삶의 방식의 변화를 주고자 하는 축제, 외부 고객뿐 아니라 지역민이 만족하는 감동 축제를 목표로 하고 있다. 2013년부터 2016년까지 문화 체육 관광부가 최우수 축제로 선정한 무주 반딧불 축제는 관광 자원을 활용하여 지역 경제 활성화를 이루어 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무주 반딧불 축제는 2017년에도 8월 26일부터 9월 3일까지 9일간 진행될 예정이다.

[참고문헌]
  • 『무주 군지』 상(무주 군지 편찬 위원회, 2003)
  • 『무주 군지』 하(무주 군지 편찬 위원회, 2004)
  • 무주 군청(http://www.muju.go.kr)
  • 무주 반딧불 축제(http://www.firefly.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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