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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500317
한자 朝鮮時代
영어공식명칭 Joseon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무주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선아

[정의]

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 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전라북도 무주 지역 역사.

[행정 구역의 변천]

조선을 건국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사용하였는데, 1414년(태종 14)에 전국을 8도제로 바꾸는 행정 구역 개편을 실시하였다. 주계(朱溪)와 무풍(茂豊)이 통합되어 무풍의 '무(茂)'와 주계의 '주(朱)'를 따서 '무주(茂朱)'라는 새로운 지명이 만들어졌다. 이때 무주 지역은 단일 행정 구역으로 편제되었으며, 치소(治所)는 주계성(朱溪城)이었다. 이후 1614년(광해군 6)에 무주 지역의 적상산(赤裳山)에 사고(史庫)가 설치되어 평안도 묘향산(妙香山)에 있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 이안(移安)되었고, 1641(인조 19)에는 선원각(璿源閣)이 건립되어 완전한 사고지(史庫地)의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1674년(현종 15) 2월에 무주현(茂朱縣)무주 도호부(茂朱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이때 금산군에 속하던 안성과 구천동 덕지리 지역이었던 횡천이 무주 지역에 편입되었다.

도호부로 승격된 후 무주부의 통치 조직은 부사[종3품] 아래에, 18세기 경우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2명, 군관(軍官) 2명, 토포 군관(討捕軍官) 70명, 아전(衙前) 37명, 지인(知印) 16명, 사령(使令) 17명, 관노(官奴) 50명, 관비(官婢) 30명으로 편제되었고, 적상산성(赤裳山城)에는 천총(千摠) 1명, 파총(把摠) 1명, 초관(哨官) 4명, 지구관(知彀官) 1명, 기고관(旗鼓官) 1명, 기패관(旗牌官) 37명, 군뢰(軍牢) 10명으로 편제되었다. 19세기 말에 간행된 『무주부 읍지(茂朱府邑誌)』에도 관노가 20명, 관비가 10명으로 감소된 것 외에는 18세기의 조직과 큰 차이가 없다. 통치 조직상에 큰 변화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895년(고종 32)에는 지방 관제를 개편하여 23부(府) 331군(郡)을 두게 되었다. 이에 따라 무주 도호부가 폐지되고 무주군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시기에 무주 지역은 잠시 전라도 남원부(南原府)에 속하였으나, 이듬해인 1896년(고종 33)에 전라도를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로 나누면서 전라북도 전주부(全州府) 무주군(茂朱郡)으로 개편되었다.

[교통 시설]

무풍과 주계가 통합된 직후에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등재된 무주현의 지리를 보면, 치소에서 동쪽으로 경상도 지례현(知禮縣) 경계까지 22.39㎞[57리], 북쪽으로 충청도 옥천(沃川)까지 3.14㎞[8리]였다. 서남쪽으로는 금산에 이르는데 그 거리가 서쪽으로 3.93㎞[10리], 남쪽으로 11㎞[28리]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치소에서 동으로 경상도 지례현 경계까지 19.24㎞[49리], 남으로 경상도 거창군(居昌郡) 경계까지 24.35㎞[62리], 서쪽으로 금산군 경계까지 5.11㎞[13리], 북쪽으로 충청도 옥천군 경계까지 3.93㎞[10리], 한양(漢陽)과의 거리는 191.65㎞[488리]로 되어 있다.

무주 도호부로 승격된 이후 19세기 말 『적성지(赤城誌)』에 의하면, 동쪽은 지례현으로 그 경계까지 27.1㎞[69리], 동남쪽은 거창군 경계까지 31.49㎞[80리], 남쪽은 안의현(安義縣) 경계까지 23.56㎞[60리], 장수현(長水縣) 경계까지 23.56㎞[60리], 서쪽은 금산군 경계까지 5.11㎞[13리], 서남쪽은 용담현(龍潭縣) 경계까지 22.39㎞[57리], 북쪽은 옥천군 경계까지 3.93㎞[10리], 동북쪽은 영동현(永同縣) 경계까지 11.78㎞[30리], 황간현(黃澗縣) 경계까지 24.74㎞[63리]이다.

무주 지역 영역의 동서 길이는 36.13㎞[92리], 남북 길이는 37.31㎞[95리]였다. 또한 무주부에서 한양과의 거리는 188.51㎞[480리]로 5일 반나절 거리, 전주 전라 감영(全羅監營)까지는 78.55㎞[200리]로 2일 반나절 거리, 강진 병영까지는 196.36㎞[500리]로 6일 거리, 해남 우수영(右水營)까지는 274.91㎞[700리]로 8일 거리, 여수 좌수영(左水營)까지는 157.09㎞[400리]로 4일 반나절 거리였고, 통영(統營)까지는 168.87㎞[430리]로 5일이 걸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무주 지역의 역원으로는 현의 동쪽 17.67㎞[45리] 거리에 소천역(所川驛)이, 현의 동쪽 25.13㎞[64리] 거리에 무제원(茂梯院)이, 현의 동쪽에 승장원(勝長院)이 있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관아의 동쪽 17.67㎞[45리]에 소천역이 있는데, 역리(驛吏)는 60명, 역노(驛奴)는 5명, 역마(驛馬)는 10마리로 제원역(濟原驛) 소속이며, 관아의 남쪽 15.71㎞[40리]에 유등원(柳等院)이 있다고 한다.

[호구와 성씨]

『세종실록지리지』에 등재된 무주현의 호수는 172호이고, 인구는 715명이었다. 조선 후기 1789년(정조 13)의 호구 수가 등재되어 있는 『호구 총수(戶口總數)』에 의하면, 무주 지역의 전체 호수는 5,446호이고, 인구는 1만 4032명이었다. 이들 중 남자는 7,315명이고 여자가 6,717명으로, 남자가 더 많았다. 각 면별로 보면, 부내면(府內面)이 860호 2,048명, 적상면(赤裳面)이 560호 1,561명, 유가면(柳加面)이 645호 1,589명, 서면이 407호 1,247명, 신동면(身東面)이 329호 989명, 풍동면(豊東面)이 399호 1,144명, 풍남면(豊南面)이 395호 1,038명, 풍서면(豊西面)이 347호 845명, 일안면(一安面)이 602호 1,350명, 이안면(二安面)이 556호 1,339명, 횡천면(橫川面)이 390호 880명이다. 읍성이 있던 부내면의 호구가 가장 많다.

1871년(고종 8)경에 간행된 『호남 읍지(湖南邑誌)』에 기재된 무주의 호수는 5,405호, 인구는 1만 3175명이다. 남자는 7,309명, 여자는 5,866명이다. 18세기보다 호구가 오히려 줄어들었는데, 유랑과 질병 등으로 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단지 무주 지방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1898년(고종 35)에 간행된 『적성지』에 등재된 호구 수는 1871년경의 『호남 읍지』에 등재된 호구 수보다 더 줄어 호수는 3,957호, 인구는 1만 5352명이다. 남자가 8,812명이고 여자가 6,540명이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무주의 토성(土姓)은 무풍에 심씨(沈氏), 박씨(朴氏), 하씨(河氏), 전씨(田氏), 주씨(朱氏), 황씨(黃氏) 등 6개 성씨가 있었고, 주계 지역에는 양씨(梁氏), 박씨, 하씨, 주씨, 최씨(崔氏), 호씨(扈氏) 등의 6개 성씨가 있었다. 현재 무주군으로 편입된 전라도 전주부 금산군의 경우, 대곡(大谷)에는 하씨, 석씨(石氏), 정씨(鄭氏), 유씨(柳氏), 안씨(安氏), 황씨, 박씨 등의 토성과 속성(屬姓)인 정씨(丁氏) 등 9성이 있었고, 안성에는 최씨, 송씨(宋氏), 양씨, 이씨(李氏)가, 횡천(橫川)에는 손씨(孫氏), 김씨(金氏) 등의 토성이 있었다. 이 가운데 무풍과 주계 양 지역에 박씨와 하씨, 주씨가 공통적으로 거주하고 있었고, 안성에 거주하는 최씨와 양씨가 주계와 중복되며, 대곡에 거주하는 하씨와 박씨, 황씨가 중복된다. 따라서 각 성으로 구분할 경우 18개 토성이 존재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무풍에는 심씨, 박씨, 하씨, 전씨, 주씨, 황씨 등 6개 토성이 있고, 주계에는 양씨, 박씨, 하씨, 주씨, 최씨, 호씨, 손씨, 이씨, 한씨(韓氏) 등 8개 토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금산군의 경우 안성에 최씨, 송씨, 양씨, 이씨 등의 성씨가 있고, 횡천(橫川)에는 손씨와 김씨 등 2개 성이, 그리고 대곡에는 하씨, 석씨, 정씨, 유씨, 안씨, 황씨, 박씨, 정씨 등 8개 토성이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내용과 큰 차이점은 없으나 주계 지역에 손씨와 이씨, 한씨가 추가로 기록되고 있다. 이씨는 안성에 거주하던 인물이 주계로 이거(移居)하거나 같은 본을 가진 것으로 볼 수도 있고, 손씨 역시 횡천의 손씨가 이거하거나 같은 본을 가진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씨는 새로 추가된 성씨이다. 따라서 20개 성씨가 존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여지도서』에는 하씨[진주], 김씨[광산], 이씨[원주], 최씨[완산], 김씨[김해], 양씨[남원], 한씨[청주], 박씨[밀양], 권씨(權氏)[안동], 안씨[순흥], 황씨[창원], 송씨[은진], 이씨[경주], 신씨(申氏)[인동], 서씨(徐氏)[달성], 기씨(奇氏)[행주] 등의 성씨가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과 쇄미록]

1592년(선조 25) 4월 13일에 일본군이 경상도 동래부(東萊府)의 부산진 앞바다를 통하여 조선을 침략하였다. 전라도를 담당할 장수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와 그의 휘하에 있던 안코쿠지 에케이[安國寺惠瓊]였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일본군은 그해 5월 25일에 임진강을 건넜으며, 6월 초에는 충청도를 경유하여 전라도로 진격하였다. 오희문(吳希文)이 지은 『쇄미록(𤨏尾錄)』에는 임진왜란 당시 무주 지역과 인근 고을의 전투 상황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적상산성 개축과 사고 건축]

적상산성 수축에 대한 논의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던 것 같다. 1610년(광해군 2)에 적상산성 개축이 건의된 이후, 산성 수축이 결정되었으나 정확히 언제 개축되었는지 알 수 없다. 『국역 적성지』에 의하면, 1614년(광해군 6)에 적상산성 안에 실록청(實錄廳)이 창건되었다고 추정되는 것으로 보아 적상산성은 실록청이 창건되기 이전에 수축되었을 것이다. 적상산성에 실록청이 건축된 것은 임진왜란 때 전주 사고(全州史庫)에 보존되어 있던 실록을 제외한 다른 사고의 실록이 모두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묘향산에 보존하던 실록을 무주의 적상산성으로 옮겨 보존하도록 하였다. 묘향산 사고에 있던 실록은 1633년(인조 11)에 무주의 적상산으로 옮겨졌다. 1641년(인조 19)에는 적상산성 안에 선원전(璿源殿)을 창건하여 『선원록(璿源錄)』을 봉안하였다. 『선원록』은 『선원 보첩(璿源譜牒)』이라고도 하였는데 왕실과 그 일가의 보첩이다. 일종의 왕실 족보였다.

[이인좌의 난과 무주]

1728년(영조 4) 3월에 박필현(朴弼賢)이인좌(李麟佐), 정희량(鄭希亮)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무신년(戊申年)에 일어났기 때문에 무신란(戊申亂)이라 불리기도 하고, 또 이인좌가 주동이 되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이인좌의 난이라고도 한다. 이인좌는 먼저 충청 병사 이봉상(李鳳祥)을 살해하고 사방에 격문(檄文)을 보내 반란에 참가하도록 호소하였다. 영남의 정희량 등은 3월 20일에 안음(安陰)에서 반란을 일으켜 안음과 거창 및 합천 등을 함락시켰다. 이인좌의 반란군과 합세하기 위해 북진해야 하는데 북진을 하기 위해서는 무주 지역을 거쳐야 하였다. 당시 무주 부사 조유수(趙裕壽)는 천부장(千部將) 이만번(李晩蕃), 중군장(中軍將) 최봉래(崔鳳來)와 함께 저항하여 반란군은 무주에 들어오지 못하였다. 이후 이인좌의 난은 진압되었고 반란 사건을 마무리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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