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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500337
한자 戊申亂
영어공식명칭 Musin Rebellion
이칭/별칭 이인좌의 난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무주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정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728년 3월 15일 - 무신란 발발
전개 시기/일시 1728년 3월 17일 - 오명항이 사로도 순무사에 임명되어 반란군 토벌 감행
전개 시기/일시 1728년 3월 27일 - 무신란에 의해 점거된 청주성 수복
종결 시기/일시 1728년 4월 19일 - 무신란 종결
성격 당쟁 사건
관련 인물/단체 이인좌|소론|남인

[정의]

1728년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소론과 남인의 급진 세력이 경종의 죽음에 영조와 노론이 관련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일으킨 사건.

[역사적 배경]

1724년 경종이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영조가 노론(老論)의 지지를 받으면서 즉위하였다. 노론의 집권으로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소론(少論)과 남인(南人)의 급진 세력은 영조와 노론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세제(世弟) 책봉의 부당성, 경종의 사인(死因) 의혹, 영조의 출생 배경 등에 관한 유언비어를 퍼트리면서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왕으로 옹립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결속을 다지면서 병권을 가진 세력들이 결탁해 나갔다. 영남 지역에서는 정희량(鄭希亮), 조성좌(趙聖佐), 호남 지역은 박필현(朴弼顯), 호서 지역은 이인좌(李麟佐), 정세윤(鄭世胤), 경기 지역은 권서봉(權瑞鳳)이 주도하여 병사를 동원하였다. 여기에 병안 병사(平安兵使) 이사성(李思晟)은 관서 지역에서 지원하기로 했으며, 중앙에서 병권을 잡고 있던 총융사(摠戎使) 김중기(金重器)와 금군 별장(禁軍別將) 남태징(南泰徵), 전라 감사 정사효(鄭思孝), 담양 부사 심유현(沈維賢)이 가담하였다.

그런데 1727년(영조 3)에 이광좌(李光佐), 조태억(趙泰億) 등의 일부 소론이 기용되면서 반란을 일으킬 명분이 약해졌고, 모의가 사전에 노출되면서 영조는 친국(親鞫)을 설치하고 삼군문(三軍門)에 수도와 주변에 대한 철저한 방어를 명하였다. 이 사건을 당시 충청도 청주에서 반란을 이끈 이인좌의 이름을 따 '이인좌의 난'이라고도 하며, 무신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무신란(戊申亂)'이라고도 하고, 비록 거병지는 청주였지만 남인들의 고장인 경상도[영남]에서 모의자와 동조자가 가장 많이 나왔다고 해서 '영남란(嶺南亂)'이라고도 한다.

[경과]

반란은 1728년 3월 15일 이인좌가 청주성을 점거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반란군은 충청 병사 이봉상(李鳳祥), 토포사(討捕使) 남연년(南延年)을 살해하고 사방에 격문(檄文)을 보내 군사를 모집하였다. 그리고 이인좌가 대원수가 되어 무리를 이끌고 북상하였다. 난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은 영조는 신속하게 조처를 취하였다. 3월 17일 병조 판서(兵曺判書) 오명항(吳命恒)을 사로도 순무사(四路道巡撫使)에 임명하고 반란군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북상하던 반란군은 안성(安城)과 죽산(竹山)에서 관군에 의해 격파되었고, 이인좌, 권서봉 등이 생포되었다. 3월 27일에는 청주성도 수복되었다. 오명항 군대가 청주를 거쳐 영남 지방으로 갔을 때에는 반란군은 지방 관군에 의해 이미 진압되었다.

한편 영남과 호남에서도 반란에 호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3월 20일 영남 지역의 정희량은 안음(安陰)[현 경상남도 함양]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곧이어 안음, 거창, 합천 등을 함락시켰다. 영남의 세력을 규합한 정희량 등은 이인좌와 합세하기 위하여 북진하였고, 그 과정에서 무주 지역을 거쳐야 했다. 당시 무주 부사였던 조유수(趙裕壽)는 반란군의 북진을 저지하기 위해 천부장으로 이만번(李晩蕃), 중군장으로 최봉래(崔鳳來)를 임명하였다. 호남에서는 박필현이 이끄는 반란군이 전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뜻을 도모했던 전라 감사 정사효가 성문을 걸어닫고 협조하지 않자, 수세에 몰린 박필현은 도주하다가 체포되었다.

무주 지역은 북진하기 위한 중도에 위치하는 동시에 산세가 험하여 은신할 수 있는 곳이 많아 반란군들이 곳곳에 몸을 숨기면서 기회를 엿볼 수 있는 곳이었다. 때문에 무주 지역으로 진입하려는 반란군을 저지해야 할 주요 지역이었다. 그런데 당시 무주 부사 조유수가 선원각과 사각을 지키려 적상산성으로 가는 중간에 병이 나면서 4월 1일에는 병사(兵使)를 역임했던 이언상(李彦祥)으로 교체되었다. 이언상은 인근 지역 관군들과 함께 성초령(省草嶺)을 통해 무주로 진군하려는 반란군을 저지하였다. 당초 성초령에 진을 치고 무주로 향하려고 했으나, 관군의 사수로 성초령을 넘지 못하고 퇴각하던 반란군은 거창(居昌)의 천총(千摠) 정빈주(鄭彬周) 등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로써 거병한 지 얼마되지 않아 주도 세력이 체포되거나 토벌되었다. 관군은 거창에서 회군하여 4월 19일 서울로 돌아왔다.

[결과]

무신란은 중앙과 지방 관군의 협조하에 신속하게 진압되었고, 영조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과 반대되는 세력을 선별하면서 통치 기반을 강화하였다. 반란을 주도한 세력이 대부분 소론이기 때문에 이후 정국 운영에서 소론은 열세에 처하게 되었다. 반란에 가담한 세력은 대부분 사형에 처해졌으며, 반란의 주도 세력과 관련된 지역은 강등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주는 인근 지역 관군들이 협력하여 반란군들을 막아내어 반란군들이 거쳐가지 못했기 때문에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다.

[의의와 평가]

무신란은 조선 정치사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사건을 통해 영조는 당쟁의 폐단을 통감하였고, 즉위 초부터 모색해 왔던 탕평책의 실시에 대한 명분을 확보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왕권 강화와 정국 안정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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