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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500891
한자 佛敎
영어공식명칭 Buddhism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원통사로 676[죽천리 1-1]|적상면 산성로 1050[괴목리 1602]|설천면 백련사길 580[삼공리 936-1]|양지길 92-38[소천리 1224]|구천동1로 111[삼공리 418-31]|무풍면 증산로 211-24[증산리 287]|무주읍 향한로 27-7[읍내리 720]|무주읍 북고사길 67[읍내리 520]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경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277년 - 안국사 창건
사찰 위치 원통사 -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원통사로 676[죽천리 1-1]지도보기
사찰 위치 안국사 -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산성로 1050[괴목리 1602]지도보기
사찰 위치 백련사 -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백련사길 580[삼공리 936-1]지도보기
사찰 위치 만복사 -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증산로 211-24[증산리 287]지도보기
사찰 위치 향산사 -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향한로 27-7[읍내리 720]지도보기
사찰 위치 관음사 -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양지길 92-38[소천리 1224]지도보기
사찰 위치 북고사 -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북고사길 67[읍내리 520]지도보기
사찰 위치 인월암 -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백련사길 184-49[삼공리 869]지도보기

[정의]

전라북도 무주군에서 석가모니를 교조로 하는 종교.

[삼국 및 신라 시대 무주 불교]

무주는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마한을 평정하면서 백제의 영향권에 들어간 이후 전라북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백제 불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나, 이와 관련된 기록이나 문화재 자료는 부족한 편이다. 백제에서는 384년(침류왕 1)에 마라난타(摩羅難陀)에 의해 불교가 처음 전래된 이후 성왕(聖王) 때에 불교의 전성기가 이루어진다. 백제 시기의 무주는 신라와 경계를 접하는 군사적 요충지였으므로 지정학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무주는 국경을 수비하는 전략적 요충 지역이었기 때문에 전쟁에서의 승리, 군사들의 안전, 전투에서 전사한 군사들의 극락왕생을 염원하기 위하여 어떤 형태로는 불교 관련 시설이 설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국경 지역이 가지는 특성상 신라와 백제의 문화가 공존하였을 가능성이 있으나 아쉽게도 이를 뒷받침할 미술사적, 고고학적 유물들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현재까지의 구전이나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무주 지방에서 가장 이른 창건 연대를 가진 사찰은 백련사(白蓮寺)이다. 즉 신라 신문왕(神文王)[681~692] 때 백련 선사(白蓮禪師)가 숨어 살던 곳에 백련암을 창건하였다는 내용과 신라 시대인 830년(흥덕왕 5) 무염 국사(無染國師)가 창건하였다는 구전이 전하고 있다. 또한 원통사(圓通寺)는 1698년(숙종 24)의 원통사 중창비(圓通寺重創碑)에 신라 시대 창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존하는 구전과 기록을 통해서 볼 때, 늦어도 통일 신라 시대에는 이 지역에 사찰이 건립되고 본격적으로 불교 활동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 시대 무주 불교]

고려 시대 전라북도 무주 지역의 불교 현황을 전하는 자료가 없어 그 현황을 알 수 없다. 다만 『적성지(赤城誌)』[1898년]의 적상산 안국사기에 의하면 안국사(安國寺)는 고려 시대인 1277년(충렬왕 3)에 승려 월인(月印)이 창건한 후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만년 대계를 위하여 승려 무학에게 명하여 복지(卜地)인 적상산(赤裳山)에 성을 쌓고 절을 짓게 하였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조선 시대 무주 불교]

무주 지역의 대부분 사찰들은 조선 중기 이후에 창건되었으며, 무주 지역의 불교는 조선 중기 이후 덕유산(德裕山) 구천동을 중심으로 일대 중흥기를 맞이하였다. 서산 대사(西山大師) 청허(淸虛) 휴정(休靜)의 스승인 부용(芙蓉) 영관(靈觀)덕유산으로 출가하여 오랜 기간 동안 수행하며 제자를 양성하였다. 또한 부휴(浮休) 선수(善修)·정관(靜觀) 일선(一禪)·벽암(碧巖) 각성(覺性)·고한(孤閑) 희언(熙彦)·운곡(雲谷) 충휘(沖徽)·임성(任性) 충언(忠彦)·송파(松坡) 각민(覺閔)[1596~1675] 등 당대의 유명한 고승들이 덕유산에서 수행하였다. 이 가운데 정관 일선·임성 충언 등은 백련사에서 입적하여 승탑이 세워져 있다. 송파 각민은 『해의(解疑)』를 펴냈다.

이외에도 모운(慕雲) 진언(震言)[1622~1703]·백암(柏庵) 성총(性聰)[1631~1700]·호의(縞衣) 시오(始悟)[1778~1868]·무경(無竟) 자수(子秀)[1769~1837]·용암(龍巖) 혜언(慧彦)[1783~1841] 등이 무주 구천동에서 수행하였거나 주석하였다. 특히 용암 혜언덕유산 백련사에서 화엄회를 개설하였는데, 전국 팔도에서 영향을 받은 자가 300여 명이나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 중기를 기점으로 해서 무주 지역의 불교는 덕유산을 중심으로 중요한 수행 수도처로 각광을 받았고, 그 이후로도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중기 이후부터 덕유산이 중심 수행 처로 급부상한 것은 당시 산 이름을 ‘여산(廬山)’이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에서 여러 승려가 염불결사(念佛結社)의 개조인 여산(廬山) 혜원(慧遠)의 백련결사(白蓮結社)를 방불케 하는 염불정토결사 운동을 전개한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중기 이후에 각종 지리지나 기록들에서 나타나는 사찰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에는 고경사(高境寺)[상산], 불두사(佛頭寺)[백운산], 산성사(山城寺), 호국사(護國寺) 등이 보인다. 『여지도서(輿地圖書)』[1760]년에는 북고사(北固寺)·구천사·원통사·청량사(淸凉寺)·상원사·중원사·호국사 등이 보인다. 가장 최근의 기록인 『적성지』에는 안국사[적상산], 호국사·상원사·북고사·구천동사·원통사·백운암(白雲庵)·청량사 등의 사찰 이름이 확인된다.

한편 광해군(光海君) 때에는 왕실의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가 적상산에 설치되어 중요 지역으로 급부상하였다. 1643년(인조 21)에는 이조 판서 겸 대제학 이식(李植)[1584~1647]이 왕명으로 사고를 순찰하고 정축난(丁丑亂) 이후 문란해진 사고의 관리와 성내의 방비를 위한 건의에 따라 호국사가 건립되었다.

불교 문화사적으로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화승(畵僧)인 의겸(義謙)이 안국사 괘불에 수화승(首畵僧)으로 참여하여 우리나라 대표적인 괘불탱(掛佛幀)을 남겼다. 또한 사장(私匠)의 대표격인 권동삼(權東三) 역시 안국사 동종(安國寺銅鐘)을 주조하였다. 당대의 대표적인 화승과 주조장이 안국사 불화와 범종 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에 원통사의 칠성탱을 통해서 의겸의 전통을 이어받은 금호(錦湖) 약효(若效)와 보응(普應) 문성(文性) 등에 의해 무주 지방에서 지속적으로 의겸의 화풍이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근대 무주 불교]

근대기에는 3·1 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불교계를 대표하여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승려 백용성(白龍城)이 1918년 무주읍에 향산 선원을 세우고 도심 포교를 위해 지장회를 조직하여 포교당을 설립하고, 부인 선원으로 참선 수행을 지도하면서 불교의 근대화에 노력하였다. 그 후 선파, 전강 등 고승들이 주석하면서 포교하여 무주 불교의 중흥에 노력하였다.

[현황]

2017년 현재 무주 지역에는 다수의 사찰이 있다. 전통 사찰로는 북고사·백련사·안국사·원통사·향산사(香山寺) 등이 있고, 일반 사찰로는 만복사(萬福寺)·인월암(印月庵)·관음사(觀音寺)·극락사·약천사·용천사·지장사·용황사·대원정사 등을 비롯하여 20여 곳이 있다. 그러나 무주 지역 다수의 사찰은 규모가 작고 각 사찰의 신도 수는 100명 내외로 영세하다. 지금도 무주의 불교는 성쇠를 거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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