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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개항 이후 1945년 8월 15일 해방에 이르기까지 전라북도 군산 지역의 역사. 옥구현에 속했던 군산은 개항 이후 형성된 각국 거류지를 중심으로 일본인들이 이주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전라북도와 충청남도라는 넓은 평야 지대를 배경으로 하고 금강과 서해안이 인접한 지리적 이점으로 지주와 상업 자본가들이 집중되며 도시의 기반 시설이 갖추어 지기 시작하였다. 강...
개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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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전라북도 군산 지역의 역사. 1876년(고종 13) 조선과 일본 사이에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뒤 일본은 자신들의 자본주의 발전에 필요한 값싼 식량과 원료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하여 국내 최대 미곡 생산지를 배후로 한 서해안 지역의 개방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런 가운데 군산이 유력한 개항장으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정작 군산의 개항은 대한 제국 정부의 독자적 결정으로 이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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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 늑약 이후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서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전개되었던 민족 운동. 군산에서는 1905년(광무 9) 을사 늑약 이후 국권 회복 운동의 일환으로 자강운동을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하였다. 옥구 군산항 민단, 대한 협회 군산 지회 등의 계몽 운동 단체나 객주 상회사 등의 단체를 조직하여 교육 계몽 활동, 식산 흥업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국채 보상 운동과 같은 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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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빌린 차관을 갚기 위해 1907년~1908년 군산 지역 객주 상회사가 중심이 되어 전개한 운동. 국채보상운동은 통감부 설치 이후 한국의 시정을 개선한다는 명목으로 도입된 차관 1,300만원을 상환하기 위해 1907년(융희 1) 2월 대구에서 시작되었다.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황성 신문』·『대한 매일 신보』·『제국 신문』·『만세보』 등의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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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군산 지역을 중심으로 미곡·어물 등 각종 물산을 위탁 판매 등의 역할을 담당했던 상인 계층. 객주의 기원이나 연혁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고려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객주란 객주 상인(客主商人)이라는 뜻이며, 주인이란 주선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다. 객주는 화물주(貨物主)에게 위탁 받은 상품을 판매함과 동시에 생산자에게 자금을 대여하고, 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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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이후 일본 상인의 경제적 침탈에 대응하고 상업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군산 지역 객주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객주 단체. 조일 수호 조규(朝日修好條規) 체결 이후 일본의 간섭 아래 부산항, 원산항, 인천항이 개항되었다. 개항된 각 항구에는 일본인 전관 거류지가 설정되고, 그 곳을 중심으로 일본은 각종 기관을 설립하며 침략에 필요한 기반을 다져나갔다. 일본의 이러한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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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군산 지역의 미곡과 해산물을 매매·위탁 판매하며 상권 유지를 위한 활동 및 군산 지역 사회 주의 운동에 도움을 주었던 상인 단체. 군산항 개항 이후 대한 제국 정부는 자본력이 부족한 국내 상인의 보호를 통해 상권을 보호하고, 외국 상인과 맞서기 위하여 객주 중심의 상업 정책을 실시하였다. 대한 제국 정부의 이러한 의지는 상회사 설립으로 나타났고, 군산 지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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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항 개항 이후 각 국 외국인의 거류를 위해 설치된 치외 법권 지역. 거류지는 조계지라고도 불리며 특정한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외국인 거류 지역을 지칭한다. 명칭은 ‘거류지’·‘조계지’로 혼용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일본, 청국, 서양 열강과 맺은 각종 조계 장정에서 ‘거류지’ 혹은 ‘조계지’라는 말을 혼용하여 사용했기 때문이다. 거류지의 종류로...
일제 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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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융희 4)부터 1945년까지 전라북도 군산·옥구 지역의 역사. 조일 수호 조규(朝日修好條規) 이후 한국에 대한 침략을 가시화한 일제는 러일 전쟁을 통해 한국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고 이어 을사 늑약을 체결 후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이후 일제는 한국 군대 해산, 사법권 장악을 통해 한국에 대한 식민지화를 진행하였다. 의병에 대한 강제 진압을 완료하고 1910년(융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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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일제의 무력 탄압으로부터 벗어나 민족 독립을 위해 전라북도 군산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민족 운동. 군산은 금강과 서해안에 인접한 지리적 환경과 김제·만경·정읍 등의 호남 평야 지대를 끼고 있어 일찍부터 미곡을 중심으로 한 각종 산물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고 군산항이 개항된 이후부터 이러한 환경은 일제의 수탈과 침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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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일제의 수탈적 농업 정책에 반대하며 농민의 권익 회복과 민족 독립을 위해 전라북도 군산에서 농민 및 농민 단체를 중심으로 전개된 운동. 일제는 1910년대 조선 토지 조사 사업, 1920년~1930년대 초반에 걸친 산미 증식 계획, 1930년대 중반 농촌 진흥 운동 등의 농업 정책을 한국에서 실시하였다. 이러한 농업 정책의 실행 목적은 식민지 지주제의 형성과 그를 통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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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서 전개된 청년 중심의 민족 운동. 1910년대부터 이미 각 지방에 종교 청년 단체는 물론 구락부, 수양회 형태의 일반 청년 단체들이 존재하였고, 이들은 조선 신문화 건설을 내세울 중심 기관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3·1 운동 이후 완전하지는 않지만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지게 되면서, 조선의 각 지방에서는 근대식 교육을 통해 신지식을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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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1945년 일제가 대륙 침략 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수행하며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서 수행한 정책. 1920년대 중반부터 중국에서 반제 항일 운동이 발발하고 중국에 대한 이권을 위협받게 된 일제는 군부를 중심으로 이권을 지키기 위해 중국 본토를 침략하기에 이른다. 일본 국내에서는 군부의 발언권이 강화되며 천황제 파시즘 체제가 확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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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부터 약 2개월 동안 전라북도 군산시를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 운동. 3·1운동 당시 군산에서는 영명 학교 학생들의 교사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에 이어서 시내 각지에서 독립 만세 시위 운동이 발생하였다. 특히 1919년 3월 30일 제1차 만세 운동 관련자들의 공판을 앞두고 군산과 옥구 군중의 야간 시위는 상당수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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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전라북도 군산시에서 불이 흥업 주식 회사의 간척 사업으로 생성된 간척지 마을. 불이 흥업 주식 회사는 1904년(광무 8) 조선에 들어와 1919년 전라북도 옥구군에 농장을 설립하고 간척 사업을 벌었다. 이들이 간척 사업을 한 곳은 전라북도 옥구군 해변에서 당시 섬이었던 무의인도(無衣人島)까지의 6㎞와 알산도(卵山島)에서 어은리까지 8㎞ 등 총 14㎞ 구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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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이후 군산 지역에서 일본인의 농장 개설과 함께 추진된 수리 사업을 했던 기관. 일본은 한국에 자국의 식량·원료 공급지, 상품 판매 시장의 역할을 강요했다. 그 중 자국의 식량 문제 해결을 위하여 한국에서 중점을 두었던 것은 농사 개량과 관개 수(水)의 확보였다. 그런데 개별 농장 단위로 농사 개량은 추진할 수 있었으나 관개 시설을 마련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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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군산 지역에서 나타났던 소수 대지주에 의한 토지 소유의 집중 현상.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은 외래 자본 주의 체제에 강제 편입됨과 동시에 자본 주의 상품이 범람하면서 농촌 경제는 파괴되어 갔다. 특히 일본 상인에 의한 화폐 상품의 반입과 미곡 등의 물자 반출은 자급 자족 단계에 머물러 있던 조선 농촌 경제의 근간을 흔들 정도였다. 이러한 현상은 일본에 의한 식민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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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이후 군산 지역에 일본인이 개설한 농장. 군산은 남으로는 만경강(萬頃江), 북으로는 금강(錦江)을 끼고 있는 삼각주로서 주변 지역은 대부분 비옥한 토지였다. 따라서 군산이 개항되자 조선의 토지에 투자하려는 일본인들이 이 지역으로 앞다투어 진출하였다. 이후 다수의 일본인이 군산과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농장을 형성, 확대해 나갔다. 일본이 군산의 개항을 서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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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미곡이 수탈된 양상. 일제 강점기 군산은 미(米)의 군산이라는 별칭으로 통하기도 하였다.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의 비옥하고 넓은 평야에서 생산된 미곡들이 군산에 집산되어 일본으로 수탈되었기 때문이다. 미곡 수탈은 개항 이후 일본 상인과 자본들이 군산에 집중되며 시작되었다. 병합 이후에는 회사령, 객주 취체 규칙 시행으로 한국인 객주들의 활동과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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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군산 지역에서 쌀을 발효시켜 술을 만든 산업. 우리나라에서 술은 각 집안마다 고유하게 가양주를 빚어내거나 주막에서 빚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는 등록된 업체만 술을 만들 수 있도록 하였다. 술의 생산을 통제하고 주세를 재정으로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가양주나 소규모 주조는 밀주로 불법화되고 양조업과 판매업이 분리되어 양조산업과 주류 판매상이 등장하게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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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군산에서 고무 물품을 제작 판매한 산업. 일제 강점기 한국에서는 고무 공업의 원료인 생고무가 산출되지 않았다. 고무 공업의 주종은 고무신 생산이 차지하고 있었고, 제작에 필요한 원재료는 일본으로부터 수입하였다. 일제 강점기 고무 공업은 규제가 적고, 소규모의 자본으로 공장을 운영할 수 있어 한국인 자본가들이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인 경영 공장은 전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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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 있었던 일본인 유흥업소. 최초의 유곽은 부산에 1902년 만들어졌으며 대규모의 공식적 유곽인 공창은 서울의 신정 유곽[1904년]이 시초였다. 군산은 청·일 전쟁 후 일본에서 일확천금을 쫓아 불나방처럼 모여든 일본의 모리배들로 뒤덮였다. 이들의 초창기 사업이라는 것이 고리대금업과 토지 브로커 등이었음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일본인들은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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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군산시에서 잔치나 술자리에서 노래·춤 및 풍류로 참석자들의 흥을 돋우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던 여성. 기생은 교양 있는 지식인이었다. 기생들은 노래·춤·악기·학문·시·서화에 능숙하고, 말씨나 행동이 고상하여야 했다. 장악원[조선 시대에 음악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에 들어가 몇 년에 걸쳐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했다. 교육은 일정 나이가 지나거나, 출산 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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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군산시에 있었던 기생들의 조합. 권번은 일제 강점기 기생들의 조합이다. 군산에는 두 곳이 있었는데, 하나는 군산 권번이고, 또 하나는 군산소화권번이다. 군산소화권번의 경우, 입교하면 4년 과정으로 시조·가곡·판소리·춤 등을 체계적으로 가르쳤다. 권번은 기생을 교육할 뿐만 아니라 관리하는 업무 대행업체로서, 등록된 기생을 요청에 따라 요릿집에 보내고 화대를 수금...
교육 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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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군산 부인 교육회에서 설립한 군산의 조선인 유아 교육 기관. 군산유아원은 군산의 조선인 유아 교육을 위해 설립되었는데, 군산유아원의 유지를 위해서 유지 후원회가 창립되었으며 군산의 조선인들의 협력으로 유지되었다. 뿐만 아니라 군산유아원의 학교 교사는 군산에서 주요 민족, 사회 운동 단체의 모임 장소로 이용되었다. 군산의 조선인 유아 교육을 위해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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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군산미선조합에서 조합원을 교육시키기 위해 만든 야간 교육 기관. 군산이 일제 강점기 쌀의 수탈항으로 성장하면서 이와 관련된 산업이 발달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정미 산업을 들 수 있다. 여기에 종사하는 미선공은 부서진 쌀을 골라내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다. 미선 조합에서 설립한 적성야학은 미선공 중 소년 남녀를 대상으로 야간 교육을 실시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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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제국이 군산 지역에 설립한 옥구항 공립 소학교를 일제 통감부가 폐쇄하고, 군산의숙을 개조해서 설립한 첫 번째 보통 학교. 일제는 1906년(광무 10) 보통 학교령을 공포하여 대한 제국의 소학교령에 의해 세워진 학교를 보통 학교로 바꾸어 식민지 교육을 뿌리 내리려했다. 이에 따라 옥구항 공립 소학교의 교원은 1906년(광무 10) 4월 1일 보통 학교령에 근거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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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전라북도 군산에 설립된 수산 교육 기관. 수산 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청원한 내용을 간추려보면 “군산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충청남도에서부터 남으로는 전라남도 진도에 이르는 해역이 있고, 특히 군산 앞바다에 있는 어청도는 남쪽의 흑산도에서 북쪽의 대청도 사이에 어선의 유일한 정박지 겸 피항지이다. 또한 어청도에서 동지나 산동 반도까지의 거리는 멀어도 수심 60심(尋)에 불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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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군산의 사설 교육 기관인 한송 의숙과 광동 의숙을 병합하여 설립한 무산 아동 교육 기관. 군산학원은 1926년 7월 8일 운영난에 봉착해있는 한송 학당과 광동 의숙을 합동하자는 군산 노동 연맹의 결의에 따라서 1926년 12월 1일 사립 한송 학당과 광동 의숙을 통합하여 설립된 무산 아동 교육 기관이다. 군산학원이 군산 노동 단체를 대표하는 노동 연맹의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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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3월 1일 군산부 신흥동에서 유지자들이 공동으로 설립하고 운영한 학교. 군산부의 빈민촌인 신흥동에 거주하는 조선인 학령 아동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였으나 유치원 설립, 고등 부기 강습생 모집 등 다양한 교육 기회를 제공하려고 하였다. 1923년 3월 1일 김경성, 이영춘, 차맹량 등이 군산부 신흥동에서 동민들과 협의하여 신흥학원을 설립하기로 하고 우선 야학을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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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군산 유지들에 의해서 군산청년야학이라는 이름으로 군산보통학교 내에 설립된 무산아동교육기관. 1933년 학교를 일신하면서 학교 이름을 양영학교로 바꾸고 이후 교사도 신축하면서 일제강점기동안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군산시민들의 지원으로 교육활동을 이어갔다. 양영학교는 1917년 군산 유지들의 기부로 군산공립보통학교의 교실을 활용하여 설립된 군산청년야학에 연원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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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광무 7) 2월 군산시 구암동에 전위렴 목사가 설립한 교육 기관. 1903년(광무 7) 2월 미국 예수교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 전위렴[Junckin,W.M]이 구암동에 설립하였다. 1904년 소학교와 중학교를 분리하여 중학교를 영명학교라고 칭하게 되었다. 1909년 특별과와 고등과를 병설하고 군산 영명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1919년 3월 5일 영명학교의 교사와 학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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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개복동 기독 청년회가 1922년 8월 개설한 여성 교육 기관. 영신여학원은 1922년 8월 군산 개복동 기독 청년회에서 창립하였다. 창립 당시에는 고등과를 두었으나 1924년 4월부터 보통과만을 운영하였다. 보통과 6년을 운영하다 경영 곤란으로 4년으로 단축하여 유지해왔다. 영신여학원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군산 시민의 지원으로 유지되어 왔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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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제국이 1899년(광무 3) 군산을 개항한 이후 설립한 초등 교육 기관. 대한 제국 정부는 1899년(광무 3) 군산항을 개항한 이후 개항에 따른 사회 경제적 변화에 대응 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옥구항에 공립 소학교를 세우도록 하였다. 대한 제국 정부가 옥구항에 공립 소학교를 설립하도록 하자 옥구 부윤은 공립 소학교 설립 위치를 옥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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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군산 지역에 김용진이 무산 아동의 문맹 퇴치 기관으로 설립한 야학교. 수업료를 낼 수 없어 학교에 다닐 수 없는 무산 학령 아동들의 문맹 퇴치를 위한 교육 기관이다. 1925년 김용진이 사재로 경장리에 일신 야학원을 설립하고 3년 동안 자비로 운영하였는데 교실이 좁았고, 유지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1927년 9월부터 경장리의 공유지인 팔마산록을 학원의 소유로 편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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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융희 2)에 1906년(광무 10) 12월 설립된 보흥 학교와 1907년(융희 1) 3월 설립된 흥영 학교를 병합하여 임피군에 설립한 교육 기관. 한말 국권 회복 운동기에 임피군의 유지들에 의하여 자강 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되었다. 대한 제국 시기 임피 지역[현 군산시]에는 학교 설립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중에 1906년(광무 10) 12월에 설립된 보흥 학교는...
기관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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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각국 조계 장정 협약에 의해 설정된 거류지 안에 거주하는 일본인·청국인들의 업무 처리 및 거류지 운영을 위해 조직된 단체. 조일 수호 조규 체결 이후 조선에서는 부산·원산·인천항이 개항되었다. 개항된 각 항구 주변에는 외국인들이 거주할 수 있는 거류지가 설립되었다. 이렇게 설립된 거류지는 특정 국가에만 개방하는 전관 거류지와 조약을 맺은 나라 모두에 개방하는 각국 거류지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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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군산 지역 최초의 청년 단체. 군산 경신구락부는 1920년대 군산 지역 청년 운동 단체 중 가장 먼저 조직된 단체로 덕·지·체 삼육을 함양하고, 도서·신문·잡지 등을 구람하며 운동부를 비치하여 신체를 단련케 하였다. 가입 회원 70여 명의 비교적 규모가 크고 잘 조직된 우파적 성격의 단체이다. 경신구락부의 중심 인물인 조중환은 1874년(고종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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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군산 지역의 청년 운동을 주도했던 기독교 청년 단체. 군산기독교청년회는 1920년대 군산 지역 기독교 청년 운동의 중심 조직으로 시대에 맞는 주제를 바탕으로 토론회, 강연회를 개최하여 계몽 운동에 앞장서고 민족 운동을 고취시킨 기독교 청년 단체이다. 종교에 관련된 주제에서 벗어나 시대에 맞는 주제를 바탕으로 토론회, 강연회를 개최하여 애국 계몽을 유도하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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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군산 지역에서 민족 운동 및 노동 운동을 주도했던 단체. 군산노동공제회는 1920년 8월 13일 군산 지역에 설립된 노동 운동 단체이다. 사회 주의에 관심을 갖고 있던 군산 지역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노동자 권리 옹호, 환난 상구(患難相求), 교육 활동을 전개하면서 민족 운동을 고취시켜 나갔다. 일제 강점기 조선 노동 공제회 군산 지회로 설립된 노동 운동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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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군산 지역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 강령을 기반으로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 운동을 주도했던 단체. 조선 노동 연맹회(朝鮮勞動聯盟會)는 군산 지역 사회주의자 조용관(趙容寛), 김영휘(金永輝), 차주상(車周相)이 중심이 되어 사회 주의 운동과 노동 운동을 전개한 단체이다. 조선 노동 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에서 분화된 조선 노동 연맹회와 같이 군산노동연맹회(群山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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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군산 지역의 노동 청년 운동을 주도했던 청년 단체. 군산노동청년회는 1925년 군산 지역에 발기된 노동 청년 운동 단체로 노동에 관련한 사회 제도와 결과를 대중들에게 알리는 사회주의 청년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 강점기 군산 지역은 쌀의 수탈과 철도의 부설 등으로 인해서 노동력이 집중되는 곳이었다. 당시는 일본인에 의한 노동력 착취 및 임금 문제가 대두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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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군산에서 노동자 이익·노동 운동의 효율성·공산주의 사회 운동 지속화를 위해 설립된 노동 운동 단체. 군산에서 노동 운동 단체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은 1920년부터 나타났고, 1926년 6월 전라북도에 있던 62개의 노동 운동 단체 가운데 군산에 약 30여 개가 있었다. 이렇게 노동 운동 단체가 많았던 배경으로는 일제의 자본 축적을 위한 공장 신설과 일본인 경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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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광무 8) 전라북도 군산의 일본인 농사 경영자들이 토지 수탈과 토지 소유권 보호, 경영 정보 교환을 목적으로 만든 이익 단체. 군산농사조합은 1904년(광무 8) 4월 군산에 진출한 일본인 농사 경영자들이 조직한 한국 최초의 일본인 농사 단체이다. 거류 지역으로부터 약 3.9㎞ 이내 토지, 가옥의 임차 및 소유만 인정되었음에도 일본인은 규정을 벗어나서 토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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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초 군산 지역 7개의 주요 정미소에서 쌀 도정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노동 운동 단체. 일제에 병합된 이후 군산은 호남 평야와 인근 충청남도 지역에서 생산되는 많은 양의 미곡을 반출하기 위한 미곡 수탈지가 되어갔다. 군산을 비롯한 전북 주요 평야 지대에는 일본인 농장이 들어섬과 동시에 대단위 간척 농장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일본인 자본가는 이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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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1930년대 초반 전라북도 군산에서 아동 교육과 여성 계몽 활동을 펼쳐 나간 여성 운동 단체. 3·1 운동 이후 여성 계몽 교육 운동론이 사회적 과제로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서울에서 시작된 여성 계몽 교육 운동은 지방으로 확산되어 갔고, 아동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어 갔다. 이후 청년 단체와 여성 단체를 중심으로 계몽 활동과 유치원 설립 운동이 진행되었다.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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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군산 내 일본인들의 자위 및 조선인들의 항쟁을 진압할 목적으로 조직된 민간 기구. 군산소방조는 1899년 11월 3일 군산 개항 이후 군산에 온 일본인들의 조직인 군산 거류지회에서 조직하였다. 이후 1912년 공설 소방조로 재창설되어 대조직으로 확대 되었다가 1939년 경방단으로 통합되었다. 군산소방조의 구성원들은 군산 내 일본인 사회를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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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서 소·말을 이용한 화물 운반 노동자들이 조직한 노동 운동 단체. 개항 이후 군산은 호남 평야와 충남 지역의 비옥한 농지를 끼고 농산물 집산지로 최적의 위치를 점하며 쌀의 집산과 대일본 수출을 위한 장소가 되었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으로 군산은 부(富)를 축적하고자 하는 일본인 자본가들이 관심을 갖는 지역으로 변하였다. 쌀의 이출입을 원활히 진행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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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 늑약 이후 일제 통감부에서 군산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서 설치한 행정 기관. 일본은 1905년(광무 9) 을사 조약을 조인한 후 12월 21일 일본 왕의 칙령으로 ‘통감부 급 이사청 관제(統監府及理事廳官制)’를 공포했다. 중앙에는 통감부와 부수적인 기구들을 설치하고 각 지역의 영사관 자리에 이사청을 두고 서울과 지방에서 본격적으로 침탈을 시작했다. 이사청은 군산을 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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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군산 지역 인력거부(人力車夫)의 상부 상조와 차주(車主)의 횡포에 대응할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 인력거는 일본인이 고안해 낸 교통 수단으로 처음에는 일본인의 관용으로 이용되다가 점포를 차리고 영업을 하면서 점차 일반에 보급되었다. 전차나 택시와 같은 새로운 교통 수단이 등장하기 전까지 급격히 늘어났고, 등장 이후에는 좁은 골목을 통행할 수 있는 장점을 살려 교통 수단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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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군산 지역 일본인 정미업자에 대항하여 정미업 종사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된 노동 운동 단체. 일제 강점기 군산은 미(米)의 군산 및 노동자의 군산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는 지역이었다. 전라북도와 충청남도 지역에서 생산된 쌀들이 군산항에 집산되었고 이로 인해 파생된 다양한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많이 존재하였다. 특히 군산에 미곡이 집산되자 쌀을 저장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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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1930년 군산 제2 공립 보통 학교 설립과 후원을 위해 조직되었던 단체. 일제 강점기 학교는 “충량한 국민 육성”을 목표로 운영되었던 기관으로 일본어 교육과 실업교육이 강조되는 공간이었다. 그로 인해 1910년대 근대 교육=식민 교육이라는 사고가 지배하고 있어 한국인들이 학교 교육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거부감은 관공립 학교 취학 거부 등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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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군산 지역 철도 노동자들의 단결과 노동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1924년 5월 26일 설립된 노동 운동 단체.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은 자본 축적을 위한 기반 시설을 마련하였다. 한국 각 지역에 식민지 공장을 비롯한 기반 시설들이 갖추어 지면서 임금 노동자와 공장 노동자가 증가하게 되었다. 식민지 기반 시설 구축에 따른 도시의 발전과 물자의 집산과 운반 등이 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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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군산 지역의 청년 운동을 주도했던 단체. 군산청년회는 문화 운동의 중심 기관으로 실력 양성, 문화 향상을 목표로 하여 조직되었으며, 강연회, 토론회, 야학회, 운동회 등의 사업을 진행하였다. 이후 경신 구락부, 동광 청년회, 군산청년회가 한 단체로 합쳐지면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서 더욱 큰 발전을 이루었다. 군산청년회의 중심 인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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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이후 군산 각국 거류지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자치제 실현 및 경제적 이익 확보를 위해 설립한 단체. 군산은 1899년 5월 1일 개항 이후 개항장을 중심으로 각국 거류지가 설정되었다. 설정된 각국 거류지에는 일본인이 다수를 점한 가운데 소수의 중국인으로 구성이 되었다. 즉 각국 거류지로 설정은 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 전관 거류지와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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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군산에 설치된 미곡 선물거래 기관. 미곡취인소는 미두장으로도 칭하는데 일제 강점기 미곡·대두와 같은 농산물이 선물거래 되던 장소였다. 이와 같은 미곡취인소는 1896년 인천 미두취인소가 처음 설립된 이후 1932년 조선 취인소령에 따라 군산·부산·대구 등지로 확대되었다. 1932년 1월 1일 설립된 군산미곡취인소는 1도(道) 1개 취인소 설치 원칙에 따라 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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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1948년 일제가 군산에 설치한 행정 구역. 한일 합방 이후 총독부 지방관 관제 발포로 군산 이사청이 군산부로 변경되었다. 1910년(융희 4) 9월 조선 총독부 지방관 관제에 따라 6월 1일에 군산 이사청이 군산부로 개칭되었고 옥구부는 옥구군으로 변경되었다. 1895년(고종 32)부터 1914년 사이 대폭적인 지방 행정 구역 개편이 있었다. 1895년 지방 관제를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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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군산부 설립 이후 부의 통치를 관장했던 군산 부윤의 통치에 자문을 담당했던 단체. 군산은 개항 이후 일제의 척식 정책과 일본인의 이주에 따른 일본인 인구가 늘어났다. 개항 초에는 일시적 이주가 많았으나 강제 병합 이후에는 정착하여 생활하기 위한 목적의 이주가 많았다. 이는 군산에 도로·철도·항만 등 사회 간접 시설 확충과 정주할 수 있는 도시 기반 시설이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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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서 활동한 경제 단체. 개항 이후 군산에는 일본에서 건너오는 일본인들이 집중되기 시작하였다. 군산이 일본과의 수출입 무역에 있어 지리적·경제적으로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군산에 정착한 일본인들은 자치 조직인 군산 거류민단과 일본인 상업회의소를 조직하여 자신들의 이해 관계를 확산시켰고, 군산 지역 객주 성장을 억제시키면서 군산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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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융희 2) 옥구 군산항 민단이 중심이 되어서 군산 지역에 설립한 자강 운동 단체. 1908년(융희 2) 5월 4일 군산 지역에 설립된 대표적인 자강 운동 단체이다. 옥구 군산항 민단이 주축이 되어서 설립하였는데 전직·현직 관료와 군산, 옥구 지역의 대지주, 객주 상회사의 대표들이 주도하였다. 다양한 교육 계몽 활동과 아울러 식산 흥업 활동을 전개하였다. 국권 회복 운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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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군산 지역의 청년 운동을 주도했던 청년 단체. 동광청년회는 금주를 실행하여 소비금으로 회비를 충당하고 회관을 건축, 교사를 증축하여 문화 운동 및 청년 교육 강화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형성된 단체이다. 1922년 12월 22일 동광청년회 설립 시기 임원진은 회장 김정태, 부회장 현제국, 총무 조영창, 교육 부장 김응배, 체육 부장 최동길, 사교 부장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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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2월 15일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가 연합하여 조직한 신간회의 군산 지회. 1920년~1930년 민족 독립운동 흐름은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두 흐름은 민족 운동의 이념·방법론·주도 세력 등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있었고,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자들의 협동 전선을 추구하며 1927년 2월 신간회가 창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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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이후 군산항 조계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외교 및 통상 사무를 원활하게 처리하기 위해서 설치한 관서. 1899년(광무 3) 5월 군산항이 개항되면서 군산 조계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외교와 통상 사무를 전담하여 처리할 기관이 필요해져 감리서를 설치하게 되었다. 옥구항 감리의 임무와 권한은 개항장에 주재하는 각국 영사와의 교섭과 항구 내 일체 사무의 관장, 즉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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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 늑약 이후 군산항에 설립된 자강 운동 단체. 옥구 군산항 민단은 을사 늑약 이후 군산항에 설립된 자강 운동 단체이다. 군산항의 민단은 1907년(융희 1) 3월경에 옥구 부윤 이무영이 중심이 되어 창립되었다가 1907년(융희 1) 7월경에 지역의 유지들이 참여하면서 재 창립한 것으로 보인다. 군산 지방의 대표적인 자강 운동 단체로 교육, 계몽을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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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전라북도 군산[구 옥구군 미면]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수리조합. 1908년 전라북도 군산[구 옥구군 미면]에 설립된 옥구서부수리조합은 우리나라 최초의 수리조합이다. 기존의 미제(米堤)와 선제(船堤)를 복구하여 관개에 이용하기 위해 설립된 이 조합은 한국인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조합원도 한국인이 많았다. 미제와 선제는 수리조합 창설 이전에도 지역의 주요 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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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군산 지역에 설치되었던 행정 구역. 근대 옥구군은 대한 제국 정부에 의해서 개항되어 개항장을 끼게 되면서 옥구부로 승격하였다. 이후 옥구군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옥구부로 승격되었고 1910년(융희 4) 일제 강점 이후 군산부가 되었다. 조선 시대 옥구현은 1895년(고종 32) 갑오 개혁의 일환으로 추진된 행정 구역 개편으로 옥구군이 되었다. 이후 1899년(광무 3) 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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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전라북도 군산 및 익산 지역의 수리 관개 시설을 확충하기 위해 임익 남부 수리조합과 임옥 수리조합을 합병하여 설립한 수리조합. 1920년 일제의 대대적인 식량 증식 정책에 호응하기 위해 전라북도의 동부 산악 지대인 고산천 상류에 대규모 제언을 신축하여 전라북도 서남부 지역의 농지를 관개하였던 수리조합이다. 조선 총독부의 수리조합에 대한 법적·재정적 지원이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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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전라북도 군산시를 포함한 만경강 하류 지역의 관개를 위해 설립된 수리 조합. 1911년 임익 남부 수리 조합의 겨울철 남는 물을 끌어들여 군산 지역을 포함한 만경강 하류 지역 약 28,760,330㎡의 관개를 위해 설립된 수리 조합이다. 만경강 하류인 임옥 수리 조합 구역은 해안 쪽에 가까웠기 때문에 농사 짓기에 부적합 곳이 많아서 지가와 수확고가 상대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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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전라북도 군산시를 포함한 만경강 중하류의 관개를 위해 설립된 수리 조합. 구역은 만경강 중하류 지역에 해당하는데 척박한데다 한해를 입는 일이 많았다. 이에 일본인 지주를 중심으로 수리 조합 설립이 추진되었고, 그 결과 1909년(융희 3) 12월 만경강 연안의 토지를 관개하기 위해서 대창(大倉) 농장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것이 임익 남부 수리 조합이다. 일본인 대지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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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융희 3) 익산군 황등면 황등리의 요교제를 수원으로 전라북도 군산시를 포함한 주변 지역의 관개를 위해 설립된 수리 조합. 요교제는 우리나라 3대 제언 중 하나였을 만큼 과거에는 규모가 컸지만 조선 초 이래 폐제되었다. 임익수리조합 사업은 폐제된 요교제를 축조하고 여기에 가둘 용수를 삼례 비비정 부근의 취수구에서 수로를 가설하여 끌어오는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이...
사건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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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 중심 인물 우재룡(禹在龍)[일명 우리견]이 군산 지역 광복 회원들과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된 사건. 우리견은 우재룡(禹在龍), 김재수(金在洙), 김재서(金在瑞)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의병 대장, 광복회(光復會), 주비단(籌備團) 등 독립 운동 단체를 조직하여 군산과 각지역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광복회에서 우리견은 지휘장을 맡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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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운동의 일환으로 1919년 3월 23일 군산공립보통학교를 불태운 사건. 군산은 신지식과 문물이 발달한 곳이면서도 동시에 일제 침략의 교두보였으므로 1919년 3·1 운동이 호남 지역에서 가장 먼저 발생하였다. 1919년 3월 5일 영명 학교 학생들이 주동이 된 독립 만세 운동이 있은 후 군산 공립 보통학교의 학생들도 만세 운동 시위를 계획하였다. 군산공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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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낙합정미소 매가리 직공들이 일본인 공장주의 일방적 임금 인하에 반대하여 임금 인하 철회를 요구하며 일으킨 파업. 일제 강점기 정미소 직공들은 일의 성격에 따라 매가리공과 미선공(米選工)으로 구분할 수 있다. 매가리공은 벼를 매통에 갈아서 왕겨만 벗기고 속겨는 벗기지 않고, 그 쌀을 가마니에 묶어 짊어지는 일을 하던 남자 노동자들을 말한다. 미선공은 정미소에서 도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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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행정 제도 개선·학교 설립·기관 유치 등과 같은 지역의 이해 관계 및 발전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지역 주민의 의견을 듣기 위해 전라북도 군산에서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개최되었던 집회. 3·1 운동 이후 1920년대에 문화 정치 시작과 사회 주의 사상 유입으로 인해 군산에서는 부민 대회(府民大會)가, 인근 옥구·임피 지역에서는 면민 대회(面民大會)와 같은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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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적정 수준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군산우마차조합원이 일으킨 화물 운반 거부 파업. 군산우마차조합은 군산 우차 조합과 군산 하차 조합이 병합하여 명칭이 개칭된 단체로 군산 하마차 조합이라고도 불린다. 군산 하마차 조합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간 주요한 이유는 현실과 맞지 않은 낮은 수준의 임금이 문제였다. 군산우마차조합에서는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군산 운송점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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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군산 시민들이 입학난 해소를 위해서 제2공립보통학교 설립을 추진한 시민 운동. 일제 강점기 군산은 2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도시였으나 한국인을 위한 보통 학교는 오직 한 곳만 있어서 입학난이 심각했다. 이에 1927년 4월 19일 군산의 각계 각층의 한국인들이 협력 단결하여 군산제2공립보통학교 설립 기성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2년 간의 활동 끝에 192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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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철도노동회 회원을 중심으로 일본인 운송업자들의 임금 인하에 반대하며 그 해결을 요구하여 일어난 파업. 개항 이후 전라북도와 충청남도 지역에서 생산되는 쌀의 집산지가 된 군산항, 화물 수송을 위해 개통된 군산선, 일제의 자본 축적을 위해 설립된 공장들은 군산 지역의 사회적 변화를 초래하였다. 이는 기존 농민층의 이탈을 촉진시키고 새로운 노동 계층을 형성하는 원인이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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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군산철도노동회에서 사용하던 회관을 건물주 이중기가 비워달라는 요청에 맞서 대책을 세워 대응해 나갔던 사건. 군산철도노동회는 박용(朴湧)의 철운 조합(鐵運組合)과 이동화(李東和)의 운수 조합(運輸組合)이 철도 노동 운동 단결을 목적으로 1924년 5월 26일 합병하여 설립된 사회주의 노동 운동 단체이다. 1931년 3월 해체되기 전까지 군산 노동 연맹회의 세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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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전라북도 지방의 대표적인 민족 운동, 계급 운동 단체인 전북 민중 운동자 동맹의 기관지인 『민중운동』 편집 위원들이 탄압 받았던 사건. 민족 해방, 계급 해방을 목표로 하는 전북 민중 운동자 동맹은 도(道)를 단위로 하는 사상 단체 중에서 가장 먼저 성립되었다. 전북 민중 운동자 동맹의 기관 잡지인 ‘민중 동맹’의 사무소는 군산에 있었다. 편집 위원들이 경성에서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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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전라북도 옥구의 일본인 이엽사 농장(二葉社農場)에서 고율의 소작료를 인하할 것을 요구하며 지역 농민 조합과 청년 단체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사건. 3·1운동 이후 1920년에 들어서며 농민 운동은 지역 유지와 청년들을 중심으로 농민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단체를 조직하며 전개되었다. 일본인 대농장들이 많았던 군산·옥구·임피 지역에서도 청년과 사회주의 지식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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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이상재(李商在)의 운구를 충청남도 한산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전라북도 군산 지역 각 사회·청년단체가 펼쳤던 장례 행사. 월남 이상재는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출신으로, 18세 때에 과거를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이후 이장식의 소개로 박정양(朴定陽)을 만나 교우 관계를 형성하였다. 그로 인해 1881년(고종 18) 신사 유람단에서 박정양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시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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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군산에서 인력거를 운행하던 인력거부(夫)들이 일본인 차주(車主)들의 일방적 임금 인하에 반대하며 일으킨 파업. 인력거는 일제 강점기 주요 교통 수단의 하나였다. 사람이 끌어 이동하는 교통 수단으로 넓은 도로는 물론이고, 크기가 작아 좁은 골목길로 이동이 가능하여 많이 이용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교통 수단인 전차·자동차·택시가 등장하면서 인력거 영업에 손실이 발생하게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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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이후 1930년대 중반까지 군산 지역 정미소 매가리공과 미선공(米選工)들이 일본인 공장주들에게 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일으킨 각종 파업. 일제 강점기 군산에는 조일(朝日)·조선(朝鮮)·낙합(落合)·육석(陸石)·장전(長田)·전전(前田)·반전(半田)·품천(品川) 정미소와 같은 크고 작은 정미소들이 1910년 이후 계속적으로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군산에 정미소가 설립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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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조선은행 군산지점 사택 건설 공사 중에 발생한 붕괴 사고. 1920년 8월 16일 조선은행 군산지점에서 사택을 신축하게 되어 기초 공사를 하던 중 파 들어가던 굴이 무너지면서 인부가 매몰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매몰된 조선인 인부 네 명이 사망하였다. 1920년 조선은행 군산지점에서는 사택을 신축하게 되어 매일 100여 명의 인부를 동원, 공사를 진행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