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5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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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寅顥 |
영어공식명칭 | Lee Inho |
이칭/별칭 | 만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청희 |
출생 시기/일시 | 1833년 9월 27일 - 이인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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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62년(철종13) - 이인호 무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865년(고종 2) - 이인호 독용산성 별장으로 선략장군이 됨 |
활동 시기/일시 | 1876년(고종 13) - 이인호 중시에 합격 |
몰년 시기/일시 | 1881년 7월 11일 - 이인호 사망 |
묘소|단소 | 이인호 묘 -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광태리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우계 |
대표 관직 | 독용산성 별장|동지중추부사|가선대부 |
[정의]
조선 후기에 활동한 삼척 출신 무신.
[가계]
이인호(李寅顥)의 본관은 우계(羽溪)이고, 호는 만성(晩醒)이다. 고조부는 이원혁(李原赫), 증조부는 이장엽(李章曄)[1770~?], 조부는 이명위(李命瑋), 아버지는 증가선대부 한성부좌윤을 지낸 이병조(李秉祚)이다. 황해도 해주 조니포(助泥浦) 만호(萬戶)와 수사(水使)를 지낸 이계철(李啓喆)의 조카이다.
[활동 사항]
이인호는 1862년(철종13) 무과에 급제하여 1865년(고종 2) 독용산성 별장(禿用山城別將)으로 선략장군(宣略將軍)의 벼슬에 올랐다. 1876년(고종 13) 중시(重試)에 합격,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 창덕궁 위장(昌德宮衛將)을 지내다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1805]의 손자이자 개화론의 선구자 박규수(朴珪壽)[1807~1876]의 동생 박선수(朴瑄壽)[1823~1899]가 1867년(고종 4년)에 경상도 암행어사를 제수받아 대구, 안동, 경주, 울산 등 경상도 각지를 두루 살펴보고 와서 각 지역의 전·현직 수령들에 관하여 상세한 보고를 올리고 있는 서계(書啓)의 내용 가운데 “독용별장이인호금작마해무졸역근(禿用別將李寅顥禁斫靡懈撫卒亦勤)”, 즉 “독용 별장(禿用別將) 이인호(李寅顥)는 금작(禁斫)[근무 태도]이 해이하지 않으며 무졸(撫卒)[부하 관리]도 근실했습니다.”라는 기록이 『일성록』에 나온다.
독용산성(禿用山城)의 현재 소재지는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금봉리 산171-1외 9필에 있으며, 금봉리독용산 정상에 위치한 산성이다. 축조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1500년 전 성산가야 때 쌓은 것으로 추측되는 가운데 임진왜란의 난리를 피하다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영남 최대 규모의 산성이라 하며 객사(客舍)와 동·서 군량고가 있어 성주, 합천, 거창의 군량미도 보관하였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때 군기고(軍器庫)에서 쇠도끼, 쇠창, 쇠화살, 삼지창, 말안장, 갑옷 등 유물이 출토되었다.
[묘소]
이인호의 묘는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광태리이씨곡(李氏谷) 신좌(申坐)에 있다. 우계 이씨의 시조 복야공(僕射公) 이양식(李陽植)의 11세손인 정언(正言) 이득성(李得成)[1429~1519]이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는 것을 보고 척주 교가(陟州交柯)[지금의 삼척시 근덕면 교가리]에 우거하다가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부남리(府南里)문필봉(文筆峰)건산치(建傘峙)에 묻힌 이후부터 이시춘(李時春)[18세손], 이만근(李萬根)[19세손], 이복년(李復年)[20세손], 이중망(李重望)[21세손], 이원혁(李原赫)[22세손], 이장엽(李章曄)[23세손], 이명위(李命瑋)[24세손], 이병조(李秉祚)[25세손], 이인호[26세손]와 이인호의 동생 이인하(李寅賀), 이인하의 차남인 조카 이완영(李宛榮)[27세손]에 이르기까지 묘소가 모두 삼척시 근덕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볼 때 수대에 걸쳐 삼척에 세거하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