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2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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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穆祖 李安社-三陟 移住 |
영어공식명칭 | Mokjo Lee Ansa’ Migration to the Samcheok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배재홍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237년(고종 24) - 삼척 이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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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거주지 -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
[정의]
조선을 건국한 태조이성계의 고조부인 고려 시대 목조 이안사의 삼척 이주.
[개설]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 이안사는 1236년 가을 무렵 본관인 전주를 떠나 삼척에 도착한 것은 그해 겨울 또는 이듬해인 1237년 봄으로 추정된다. 이후 이안사는 삼척 지역에 약 17년 동안 거주하였다. 그동안 이안사는 평창이씨 효공왕후와 결혼하였다. 삼척은 효공왕후 이씨의 모친인 돌산군부인 정씨의 외향이기 때문에 효공왕후 이씨에게는 외외향이 된다.
[삼척 이주 배경]
전주 지역의 유력한 토착 세력이던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1274]가 자기 본관을 떠나게 된 이유는 자기 세력의 기반인 향촌 사회를 붕괴시키는 수령의 악정(惡政)에 대한 불만과 당시 집권 세력인 최씨 무인정권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또 최씨 무인정권의 안일한 대몽항쟁 의식과 농촌 현실을 무시한 항전 방식이 농민들의 궁핍을 가속화시켜서 결국 이안사 자신의 생활 근거지인 향촌 사회가 붕괴되고 있다는 불만이 커졌다. 이러한 평소의 불만이 관기(官妓) 문제로 지방관과의 불화로 이어져 폭발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이안사는 자기 추종 세력을 거느리고 전주를 떠났다.
[삼척 거주 기간]
목조 이안사가 전주를 떠난 시기는 대체로 고려고종 때인 1236년(고종 23) 가을 무렵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안사가 삼척에 도착한 것은 그해 겨울 또는 이듬해인 1237년(고종 24) 봄으로 여겨진다. 당시 이안사가 삼척에서 터전을 잡은 곳은 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일대였다.
이안사가 처음 전주를 떠날 때 이주지로 택한 곳은 그가 평소에 혜정(惠政)이 베풀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던 의주(宜州)였다. 그러나 이안사를 따라온 170여 호나 되는 대규모 추종 세력의 이동이 어려웠기 때문에 삼척을 중간 정착지로 정하고 임시 거주하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삼척에 일단 정착한 이안사는 최종 목적지인 의주로 이주하기 위하여 배를 건조하는 등 준비를 하였다. 그 후 이안사는 강원도 영동 지역에 몽골 침입으로 인한 사회 혼란을 틈타 1253년(고종 40) 겨울 또는 그 이듬해인 1254년(고종 41) 봄에 다시 삼척을 떠나 의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보면 이안사는 삼척 지역에 약 17년 동안 거주한 셈이 된다.
[삼척과의 관계]
목조 이안사는 약 17년을 삼척에 머무는 동안 평창이씨 효공왕후(孝恭王后)와 결혼하였다. 그런데 효공왕후 이씨의 모친 돌산군부인 정씨는 삼척을 본관으로 하는 삼척김씨김인궤(金仁軌)의 외손녀였다. 이에 따라서 삼척은 목조비 효공왕후 이씨의 모친인 돌산군부인 정씨의 외향으로, 곧 효공왕후 이씨의 외외향(外外鄕)인 셈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1393년(태조 2)에 삼척을 부(府)로 승격시키고 홍서대(紅犀帶)를 하사한 것도 바로 삼척이 목조이안사의 비인 효공왕후 이씨의 외외향이기 때문이었다. 또 목조이안사가 삼척에 머무는 동안 이안사의 부모, 즉 이양무(李陽茂) 부부가 모두 사망함으로써 삼척에 장사를 지냈다. 현재 삼척에 있는 준경묘(濬慶墓)와 영경묘(永慶墓)가 바로 이안사 부모의 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