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2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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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鐵器時代 |
영어공식명칭 | The Iron Ag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
시대 | 선사/철기 |
집필자 | 이상수 |
철기 유적 - 강원도 삼척시 오분동 | |
철기 유적 -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하맹방리 | |
철기 유적 -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호산리 | |
철기 유적 -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노경리 | |
철기 유적 - 강원도 삼척시 증산동 |
[정의]
강원도 삼척 지역에서 철을 이용해 도구로 사용하게 된 시기부터 삼국시대 이전까지의 시기.
[개설]
대체로 한반도에서 철기시대는 청동기 제작이 본격화된 기원전 3세기말경 중국 북방으로부터 새로운 문화, 즉 철기문화가 들어옴으로써 시작된다. 이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300년경부터 기원후 300년까지의 약 600년 동안에 해당되지만 청동기시대 후기와 겹치는 기원전 300년경부터 기원 전후까지를 초기철기시대, 기원 전후부터 기원후 300년까지를 원삼국시대로 나누어 부르고 있다.
초기철기시대는 청동기시대 후기에 중국으로부터 철제품이 들어오면서 철기의 현지 생산이 시작되는 시기로, 단단하고 예리한 철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다양한 종류의 무기류와 농공구류가 만들어졌다. 특히 철제 농기구의 보급은 대규모 농경을 가능케 하여 생산력을 급속히 증대시키는 등 변혁을 가져왔다. 철의 제조 공정을 수행하는 전문 집단이 발생하고 철이 부(富)의 척도가 되는 등 사회 계급 분화를 촉진시키기도 하였다. 또 철제 무기 출현과 농업 생산력을 바탕으로 군사력이 강력한 국가가 출현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철기문화는 중국에 가까운 북부 지방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남부 지방에서는 기원전 1세기경에 본격 확산하게 된다. 그 계기가 된 것은 중국의 한(漢)문화 유입이었다.
원삼국시대는 문헌상 삼한시대, 한국사에서의 부족국가·성읍국가(城邑國家)[고대 서양의 도시국가 형태]·연맹왕국시대에 해당된다. 즉 삼국이 고대국가 체제를 마련할 수 있게 된 기틀이 된 시기이다. 철기시대의 주거 생활은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주로 평야 또는 하천과 가까운 야산이나 구릉지대에서 취락을 이루고 살던 것과 달리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주로 살던 큰 강가와 하천변의 대지 또는 해안가의 모래언덕에 움집을 짓고 살았다. 움집의 기본 형태는 네모꼴로 청동기시대와 별 차이가 없지만 입구가 돌출된 철(凸)자형 움집과 큰 방에다 입구 시설인 작은방이 딸린 여(呂)자형 움집도 만들어졌으며, 육각형 주거지도 만들어 사용하였다. 집 내부에는 기존의 화덕 대신 부뚜막과 구들을 설치하여 이용하기도 하였으며, 내부 생활 공간은 더욱 확대되는 경향을 보인다.
당시 무덤으로는 널무덤[목관묘(木棺墓)], 덧널무덤[목곽묘(木槨墓)], 독무덤[옹관묘(甕棺墓)], 돌무지무덤[적석총(積石塚)] 등이 유행하였다. 토기는 청동기시대 민무늬토기[무문토기(無文土器)]의 전통 위에 중국의 영향과 새로운 토기 제작 기술 보급으로 검은간토기[흑도(黑陶)], 덧띠토기[점토대토기(粘土帶土器)], 경질민무늬토기[경질무문토기(硬質無文土器)], 두드림무늬토기[타날문토기(打捺文土器)] 등이 만들어졌다. 또 한국식구리검[동검(銅劍)]·구리거울[동경(銅鏡)]·구리방울[동령(銅鈴)]등 청동기류, 쇠칼·쇠고리칼·쇠화살촉·쇠창 등의 철제무기류, 쇠도끼·쇠삽·쇠낫 등 철제 농공구류가 활발하게 제작되어 사용되었다.
철기시대는 역사상 북부 지역에서는 고조선과 위만조선에 이어 고구려가 등장하는 시기이고, 남부 지역에서는 삼한이 자리 잡던 시기이다. 서울 지역, 경주 지역, 김해 지역 등에서는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중심 세력이 독자 형성되면서 각각 백제·신라·가야 등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이 시대의 야철(冶鐵)[철을 생산하고 벼리는 공정] 방법이 중국식을 답습한 것인지 자체 개발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최근 중국에서 전국시대나 한대(漢代)의 야철지(冶鐵址)들이 발굴된 예가 있다. 그 형태는 경주 부근의 야철지와 다르다. 이로 볼 때 초기에는 중국식을 그대로 답습하다가 점차 자체 개발한 것으로 추측된다.
[삼척의 철기 문화]
강원도의 철기시대에는 동예(東濊)의 일원인 예국(濊國)·맥국(貊國)·실직국(悉直國) 등 독자 정치체인 소국(小國)들이 존재하고 있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영동 지역은 4세기에 접어들면서 점차 영남 지방 신라와의 교섭을 통해 신라 문화가 점차 수용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1990년 강릉 안인리 주거지 유적이 발굴된 이래 최근에 이르기까지 영동 전역에서 상당수의 생활 유적이 조사되어 예족(濊族)의 주거 문화 양상이 어느 정도 밝혀지게 되었다. 영동 지역의 철기시대 생활 유적은 신석기 유적과 같이 동해 바다와 가까운 호숫가나 하천가의 야트막한 사구지대에 집중해서 입지하고 있다. 지금까지 영동 지역에서 발굴된 철기시대 대표 유적으로는 양양 용호리 유적, 양양 가평리 유적, 양양 송전리 유적, 양양 지경리 유적, 강릉 동덕리 유적, 강릉 교항리 유적, 강릉 방동리 유적, 강릉 초당동 유적, 강릉 강문동 유적, 강릉 병산동 유적, 강릉 안인리 유적, 강릉 금진리 유적, 동해 망상동 유적, 동해 송정동 유적, 삼척 하맹방리 유적, 삼척 호산리 유적 등이 있다. 이들 유적에서는 외래 문물인 오수전(五銖錢)·한식토기(漢式土器)·하지키토기(土師器)와 더불어 경질민무늬토기와 두드림무늬토기, 각종 철제품, 은귀걸이[은제이식(銀製耳飾)], 옥구슬류, 목기, 골각기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또 철제품을 직접 제작한 단야 작업장과 송풍관, 거푸집[용범(鎔范)], 쇠집게, 쇠망치 등도 확인되었다. 이와 같은 조사 성과에 힘입어 영동 지역 철기시대 문화의 실체가 점차 밝혀지면서 한반도 철기시대 문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게 되었다.
삼척 지역에서는 1990년대부터 최근까지 초기철기~원삼국시대에 해당되는 몇몇 유적들이 주요 하천 유역에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삼척 지역의 철기시대 유적으로는 오십천 하류역의 오분동 유적, 마읍천 하류역의 하맹방리 유적, 가곡천 하류역의 호산리 유적, 가곡천 중류역의 노경리 유적, 증산동 유적 등 다섯 곳이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삼척 지역에서 최초로 발견된 하맹방리 유적은 일부분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영동 남부의 삼척 지역에서 철기시대 여(呂)자형 집자리 1기가 처음으로 확인되고, 경질민무늬토기와 두드림무늬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또 최근에 발굴된 호산리 유적에서도 직사각형 및 철(凸)자형 주거지 4기가 확인되었다. 이곳에서는 경질민무늬토기, 두드림무늬토기, 가락바퀴[방추차(紡錘車)], 그물추[어망추(漁網錘)] 등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다. 특히 호산리 유적 주거지에서는 신라계 토기가 출토되고 있어 철기시대에서 신라시대로 이행하는 과도기 전개 양상을 잘 보여 준다. 이러한 문화 양상은 영동 지역의 강릉시와 동해시 지역 철기시대 문화 양상과 거의 비슷한 것으로, 영동 지역 예족의 신라화 과정 일면을 살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미루어 보면 삼척 지역의 주요 하천 유역 주변 사구지대에 철기시대 취락이 대규모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앞으로 이들 유적 발굴 조사가 적극 이루어져서 상당한 자료가 축적되면 삼척 지역 철기시대 문화의 실체뿐만 아니라 삼국 형성 이전에 삼척을 중심으로 형성·발전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실직국(悉直國)과 실직국의 영역에 속한 읍락들의 모습이 자세하게 밝혀 질 것이다. 또 영동 지역에 위치해 있던 동예 사회의 역사 문화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