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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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 越美島-葛南- |
영어공식명칭 | Wolmido and Gallammaeul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갈남리 |
집필자 | 이한길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4년 -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갈남리가 만들어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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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74년 -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갈남1리·2리가 만들어짐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9년 - 갈남항이 소규모 어항개발 지원항으로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12년 - 갈남항에 방파제와 물양장 완공 |
갈남마을 -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갈남리 |
[정의]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에 있는 마을과 큰 섬.
[개설]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갈남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갈산과 신남을 장호리에서 분리시켜 새로 행정구역을 만들면서 두 마을의 첫 글자를 따서 갈남리라 하였다. 1960년대 미역 채취로 인구의 유입이 많아지자 마을이 커지면서 1974년 행정구역을 조정하게 되었다. 갈산 지역을 갈남1리, 신남 지역을 갈남2리라 하여 두 개의 마을로 분리하였다. 갈산은 ‘갈뫼’란 옛 지명을 한자로 고친 것이고, 신남은 ‘섶너미’를 고친 것이다. 칡이 많이 있는 곳이라 하여 칡 ‘갈(葛)’자를 붙여 갈산이라 불렀다. 문헌에 ‘갈산’이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삼척부사를 지낸 허목(許穆)이 쓴 『척주지(陟州誌)』이다.
갈남리는 원덕읍 북부에 위치하며 동쪽은 바다에, 서쪽은 용화리, 남쪽은 임원리에 북쪽은 장호리에 인접하며 동서 8㎞, 남북 4㎞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마을 남쪽에 화순산(花旬山), 북쪽에 후현산(後峴山), 서쪽에 풍취산(風吹山), 중앙에 화방산(花芳山)이 있어 마을을 지켜주고 있다. 화방산은 갈남마을 해변으로 뻗어 있으며 방파제와 연결되는데 생긴 모양이 누에와 유사하여 누에산이라 불린다.
조선 인조 무렵 여양 진씨는 갈산에, 엄씨는 신남에 이주하였고 그 후 엄씨의 외손 밀양 박씨, 삼척 김씨 등이 이주했다. 진씨가 이 곳에 정착한 이유가 있다. 낙향하여 갈남 바닷가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잠을 자고 일어나보니 전날 없던 바위가 바다 위로 올라와서 이상히 여기고 살펴보니 바위 전체에 전복이 빼곡히 붙어 있었기에 해산물이 풍부하여 살기 좋은 곳임을 알고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여양 진씨가 개척한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2013년 갈남리에 진씨는 4호에 불과하다. 오히려 후대에 들어온 경주 이씨, 삼척 김씨 등이 많이 살고 있다. 호구 수는 1916년 106호, 1982년 255호, 1991년에는 갈남1리 125호 406명, 갈남2리 104호 308명이 거주하였다. 그러던 것이 인구가 차츰 감소하여 2013년에는 갈남1리는 94호 164명으로 줄어들었다. 마을의 주요 연령층은 50대~80대이다. 노동력이 왕성할 시기인 20대~40대는 소수이기 때문에 청년회조차 조직되어 있지 않다. 교육기관으로는 신남분교가 있다. 1966년 7월 전화가 개통되었고, 1968년 8월 전기에 이어 1981년 10월 시내버스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갈남항의 개발]
갈남항의 개발은 마을의 모습을 가장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사건이다. 항구는 제1종, 제2종, 제3종, 군소어항으로 구분하는데 갈남항은 군소어항에 속한다. 1989년에 소규모 어항개발 지원항으로 지정되어 1차로 1993년 방파제 109m와 물양장[소형 선박이 이용하는 부두] 52m가 설치되었고, 2012년에 방파제와 물양장을 완공하였다. 방파제와 물양장이 완공됨으로써 마을의 외형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마을 앞의 해변에는 아름다운 모래사장이 펼쳐졌었으나, 백사장 전체를 메워서 물양장으로 만들었다. 방파제가 완공되기 전까지는 샛바람에 파도가 높거나 태풍이 불면 장호항으로 피항을 했으나, 현재는 샛바람으로 파도가 높아도 갈남항에 정박시키거나 소형 선박의 경우 크레인을 이용해서 물양장으로 끌어 올리는 등 피항을 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물양장이 완공됨에 따라 승용차 100대 이상을 주차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 공간은 배의 정박뿐만 아니라 미역건조장, 주차장, 그물 손질하는 공간 등 마을주민들의 다목적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나, 천혜의 경관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갈남리의 생업]
갈남마을은 전통적으로 어업에 의존하여 생활했다. 바다와 인접했기에 해산물이 풍부하며 특히 신남 앞바다에 정치망 어장이 있어 주요 소득원이 되어왔다. 이 어장은 7명이 공동으로 운영한다.
갈남마을 해변은 갯바위가 유난히 많아서 미역, 우뭇가사리 등 해초류가 많이 자랐고, 이를 먹이로 삼는 전복, 성게, 해삼 등도 많이 잡혔다. 일제강점기에는 갈남마을에 전복 가공공장이 세워졌을 정도로 전복이 많았고, 1960년~1970년대에는 제주도에서 출가물질을 온 해녀 50~60명과 머구리[제주에서 물질을 하는 남자를 일컫는 말] 잠수부 10여 명이 물질을 했다. 인근에서는 가장 많은 해녀와 잠수부가 물질을 할 만큼 해산물이 풍부했다.
갈남마을은 경작지가 협소하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어업에 의존하여 생활했다. 갈남마을 주민들은 경우 1940년~1950년대에는 명태로 먹고 살았고, 1960년~1970년대에는 미역으로 먹고 살았다고 말한다.
19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정라진에서 고포까지 명태잡이 어선으로 성황을 이뤘으며 갈남 해안은 명태잡이 돛배로 가득 찼다. 갈남 해안은 돛배가 드나들기 좋은 해안이어서 호산, 원덕의 배까지 정박을 했고, 명태잡이 배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남북이 분단되기 전에는 1월~2월이면 돛배를 타고 함경도까지 올라가서 명태를 잡았다고 한다. 그때는 명태가 엄청나게 잡히던 시절이어서 갈남마을뿐만 아니라 어촌 곳곳의 덕장에서 명태를 칡넝쿨로 꿰어 말렸다. 이 시기에는 명태가 가장 흔한 생선이었고, 대구는 귀했는데, 현재는 반대가 되어 대구가 많이 잡히는 반면 명태는 거의 잡히지 않는다.
또한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 제주도 해녀들을 모집하여 미역을 채취하였는데 갈남마을 주민 2~4명이 제주도로 내려가서 각각이 제주도 해녀 10~12명을 모집해 왔다. 이렇게 해녀를 모집해서 데려오는 사람을 일명 해녀사공이라고 하는데 해녀사공은 자신이 모집해 온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의 일정 부분을 수수료로 챙겼다. 많을 때는 제주도 해녀 50~60명이 갈남마을에서 출가물질을 하며 미역, 전복, 문어, 해삼, 성게, 멍게, 우뭇가사리, 다시마 등을 채취하였다. 이때 갈남마을에 들어온 해녀 중에는 갈남마을 총각과 결혼하여 정착한 해녀들도 있었는데 이들을 출가해녀라고 한다. 현재는 해산물이 고갈되어 제주도 해녀를 모집해서 데려오지는 않고, 갈남마을에 거주하는 해녀 7명이 해산물을 채취한다. 미역이 많이 채취되던 1960~1980년대에는 제주도 해녀뿐만 아니라 머구리 잠수부도 갈남마을에서 많이 활동을 했다. 많을 때는 10명 이상의 잠수부가 거주하며 미역 등 다양한 해산물을 채취하였다.
갈남마을에 해녀와 머구리 잠수부가 많았던 것은 갈남 해안에서 해산물이 풍부하게 채취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갈남마을 주민들은 4~6월까지 미역 채취 수익으로 1년을 풍족하게 생활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에 양식 미역이 유통되면서 자연산 미역의 수요는 줄어들었다.
오늘날도 갈남마을의 주요 수입원은 미역이지만, 미역 채취로 인한 수입은 어촌계원 59명이 나눠 갖기에 별도의 수입원이라 하기는 어렵다. 마을에 어선은 17척이 있고 이 중 9척이 문어잡이 어선이다.
[갈남리의 단오 풍속]
이 마을에서는 단오를 최고 명절로 삼고 있다. 이날이 다가오면 인근 학교에 협조전을 보내 학생들을 등교를 시키지 않고 마을 단오잔치에 참가시켰다. 이 단오잔치에는 온갖 체육활동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학생들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청·장년층이 외지로 나가면서 자연스레 단오행사 또한 점차 간소화 되어 갔다. 2013년 현재는 마을 주민들이 함께 모여 식사를 겸한 술자리를 갖는 형식으로 행사가 구성되어 있다. 마을에서는 단옷날이 다가오면 가장 먼저 이장과 부녀회장이 분주해진다. 이들은 실질적으로 마을 단오행사를 주관해야 하기 때문에, 단옷날이 가까워져 오면 행사프로그램 구성과 메뉴 선정에 관한 회의를 하며 단오행사를 준비한다.
[갈남리의 제례]
갈남1리는 음력 정월 첫 자일[지지(地支)가 자(子)로 된 날]과 10월 첫 오일[지지(地支)가 오(午)로 된 날]에 재례 지내는데 백호성황신이라 하여 마을을 호랑이가 이룩했다고 하며 호랑이를 신으로 섬기며 개고기를 제물로 사용했다. 요즘에는 소머리와 우족을 쓰는데, 바닷가에는 호랑이굴이 있다. 당집 내부에는 성황지신과 토지지신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바닷가 해당에는 당집은 없으나 소나무를 신수로 삼고 있으며 이곳에 실, 천, 명태를 걸어놓았고, 신수 앞에는 돌로 된 남근석이 박혀 있다. 이 마을에서는 바다 일을 하는 사람들이 주로 와서 비는데 해당할머니라고 한다.
갈남2리의 당집을 해신당이라 칭한다. 이 마을에는 큰서낭과 해신당이 있는데, 본 서낭당에는 마을을 개척한 엄씨 할아버지를 모셔놓았다. 당집 내부에는 성황지신이라고 쓴 위패가 있다. 해신당은 여신을 모신 제당으로 내부에는 처녀의 화상(畫像)[얼굴을 그린 것]을 모시고 있으며 향나무로 깎은 남근을 매달아 놓았다. 매년 음력 정월 보름과 음력 10월 축일[지지(地支)가 축(丑)인 날]에 제사를 지내고 해신이 된 처녀를 위로하고 풍어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한다. 마을에서는 매년 엄씨 할아버지와 해신을 위한 제사를 지내는데, 제관 3명은 엄씨 할아버지에게로 가고, 2명은 해신당에 가서 제를 올린다.
[큰섬, 월미도]
월미도는 육지에서 약 300m 떨어진 곳에 있다. 해발 20m, 둘레 100m 정도의 섬으로 흙과 사질암석산이다. 월미도에는 송림이 우거지고 암벽 사이로 교목이 울창하며 상층부에는 소나무 등의 식물이 자생하고 있다. 조그만 늪, 잔디밭과 함께 수백 명이 앉을 만한 백사장도 있어 경치가 좋다. 큰섬 주변에는 갯바위가 많이 있어 낚시를 하는 이들도 많고, 스노클링 등 해양레저를 즐기는 사람들도 많다. 요즘 피서객들이 많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큰섬은 갈남마을 앞을 막고 있어서 큰 파도로부터 마을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월미도 주변은 미역이 많이 나는 곳으로 갈남마을 주요 미역 채취권역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갈남마을 주민들은 월미도를 마을의 상징으로 생각하고 있다.
1970년대 초반에 월미도에 간첩이 침투하여 동굴에 숨어서 무전 연락 등을 취했기 때문에 이후로 월미도를 군부대에서 관할하게 되었다. 주민들의 왕래가 끊기자 갈매기가 섬의 주인이 되었고 갈매기 수가 늘어나면서 배설물로 인해 고사하는 나무가 많아지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출입이 자유로웠을 때에는 갈매기 수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는데 지금은 갈매기 섬이 되었다.
월미도는 큰섬, 갈남섬, 대도섬이라고도 불리는데 마을 주민들은 주로 큰섬이라고 한다. 갈남마을 앞에 있는 가장 큰 섬으로 갈남마을에 있기 때문에 갈남섬이라고도 한다.
1971년 마을주민인 이재훈[남, 61세]이 월미도라 부르기를 제안했다. 그림을 그리던 친구와 1971년 마을 안내판을 제작하게 되었는데 ‘큰섬’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인천의 월미도보다 아름답다는 의미에서 넘을 월(越), 아름다울 미(美), 즉 월미도(越美島)라 명명했고, 그 이후로 대외적으로는 월미도라는 명칭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주민들은 ‘큰섬’이란 이름을 선호했다.
월미도는 바다에서 떠내려왔다는 전설이 있다. 근덕면 맹방의 덕봉산, 원덕읍 호산리의 해명산 등과 같이 원래는 3형제봉이었다. 어느 날 바다로 흘러들어 떠내려 가다가 각기 3곳에 정착하였는데 큰섬이 3형제 중 가장 큰형이라고 한다. 그래서 큰섬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월미도에는 약수와 관련한 전설도 있다. 옛날 갈남마을에는 한 효녀가 홀로 된 노모를 모시고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노모가 앓아누웠고 병명을 알 수가 없어 효녀가 애를 태우고 있었는데 용한 의원이 진맥을 하고는 한센병이라고 일러주었다. 효녀는 온갖 약을 구해서 어머니에게 먹였으나 차도가 없었다. 그래서 효녀가 백일기도를 드리던 중 마지막 날 신령님이 나타나서는 월미도의 약수에 몸을 씻으면 나을 것이라고 일러주었고 효녀는 떼배를 만들어서는 마을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밤에 몰래 어머니를 태우고 섬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어머니를 약수에 몸을 담그게 하고 씻기자 거짓말처럼 나았다. 이후로 신령님이 노해서 약수를 막았다고 한다. 이 약수에 관해 전설을 불신하는 이들은 ‘바위가 파여서 웅덩이가 생겼는데 빗물이 고여 있는 상태가 약수처럼 보였을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한다.
토끼똥을 보았다는 사람이 있으나 실제로 토끼를 본 사람은 없다. 어쨌든 큰섬에 토끼가 살았다고 주민들은 믿고 있었다.
[애바위 이야기]
애바위의 소유권은 갈남마을에 있다. 애바위는 갈남마을의 주요 미역 채취권역에 속해 있으며 짬에 해당하는 바위섬이다. 그런데 이 애바위에 얽힌 전설은 갈남마을 사람들에게 전승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한 신남마을의 전설로 내려오고 있다. 갈남마을에 속한 섬이지만 갈남마을에서는 이 섬이 보이지 않는다. 반면 신남마을에서는 애바위가 훤히 보이기 때문에 신남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섬을 소재로 이야기를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
신남마을은 1986년 해신당을 건립하고, 2000년에 남근 조각공원을 조성하고 2002년에는 해신당공원 내에 어촌민속전시관까지 건립하면서 애바위전설을 콘텐츠화하여 많은 관광객을 받아들이고 있다. 갈남주민들이 애바위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미역을 채취해서 벌어들이는 수익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신남마을 주민들은 애바위를 관광 상품화하여 경제적으로 큰 혜택을 누리고 있다.
애바위에 얽힌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처녀가 애바위에 가서 미역을 채취하다가 큰 풍랑을 만나서 죽었고 이 때문에 원혼이 되었다는 것까지는 동일하다.
“어느 날 신남마을에 사는 처녀가 혼례를 약속한 이웃 총각에게 미역을 뜯기 위해 돌섬까지 배를 태워 달라고 했다. 총각은 돌섬에 처녀를 내려주면서 한낮이 되면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을 한 후 뭍으로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큰 풍랑이 불어서 총각은 배를 띄울 수가 없었다. 총각은 처녀를 애타게 부르며 밤을 지새우고 파도가 잦아들었을 때 돌섬으로 갔지만 처녀는 풍랑에 휩쓸려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처녀가 죽은 후부터 신남마을에는 고기가 잡히지 않았고, 바다에 나간 어부들이 풍랑을 만나서 죽는 사고가 빈발했다. 사람들은 처녀의 원혼 때문이라고 믿고 산 언덕에 사당을 짓고 모셨다. 그러나 그해 겨울에도 바다에 나간 장정들이 풍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처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온 정성을 쏟아 치성을 올렸지만 여전히 고기는 잡히지 않고 사고는 이어졌다.”
여기까지는 동일하고 이후로 원혼이 풀리는 과정이 두 가지 방식으로 전해진다.
첫째, 그러던 어느 날 총각이 잠을 자는데 꿈속에 처녀가 나타나서 처녀로 죽은 원혼을 달래어 줄 것을 하소연을 하였다. 총각은 잠에서 깨자 당장 향나무로 남근을 깎아 신수(神樹)에 매달아 놓고 처녀의 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올렸다. 이후로는 총각에게는 고기가 많이 잡혔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마을사람들은 물고기가 잡히지 않은 것이 애쓰다가 죽은 처녀의 원혼 때문이라 믿고, 나무로 남근을 깎아 해신당 신수에 매달고 동제를 지내게 되었다. 그 후로는 마을 주민들은 물고기를 예전처럼 잘 잡을 수 있었고, 해난(海難)도 없어졌다. 마을사람들은 돌섬의 이름을 처녀가 살기 위해 애를 쓰다가 죽었다고 하여 ‘애바위’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그러던 어느 날 화가 난 마을 청년이 술에 취해 서낭당에 들어가서 제당을 부수고 소변을 누었다[혹은 청년이 술에 취해 바다를 향해 소변을 봤다]. 그 일이 있은 후 고기도 잘 잡히고 해난 사고도 없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처녀가 남자를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고 이후로는 나무로 남근을 깎아서 해신당 신수에 걸어 놓고 치성을 드리게 되었다. 그리고 돌섬의 이름을 처녀가 살기 위해 애를 쓰다가 죽었다고 하여 ‘애바위’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