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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500350
한자 義兵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무주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윤상원

[정의]

1895년에서 1910년 사이 전라북도 무주 지역에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전개된 의병 항쟁.

[개설]

무주 지역은 영남과 호남을 양쪽에 두고 덕유산(德裕山)이 위치하여 영호남의 의병 활동이 용이하였던 곳으로 강무경(姜武景)·문태서(文泰瑞)·김동신(金東臣)·박춘실(朴春實)·신명선(申明善) 등 많은 의병 부대가 활동하였다.

[무주 지역의 의병과 주요 활동]

무주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에서 태어난 강무경은 1905년(고종 42)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김율(金聿)이 이끄는 의진(義陳)에 소속되어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1907년 김율이 사망하자 심남일(沈南一)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그의 선봉장이 되어 전라남도 강진과 영암, 장흥, 함평, 보성, 전라북도 남원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십 차례의 교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1909년(순종 3) 의병을 해산하라는 정부의 조칙에 따라 자진 해산하고 능주로 잠행하였으나 은신하던 중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김동신은 1906년(고종 43) 약 30명의 의병을 이끌고 덕유산에 있는 자원암(紫原庵)에서 거사하였다. 홍주(洪州)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나 패배하였다. 1907년 음력 8월 기우만(奇宇萬) 등과 함께 전라북도 정읍 내장산의 한 사찰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1908년 2월 약 1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용담군[현재 전라북도 진안군] 구랑(九郞)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큰 타격을 주었으며, 무주군 횡천면 삼공리에서 일본군과 다시 교전하였다. 3월 6일 스스로를 삼남 의병도 대장(三南義兵都大將)이라 칭하고 8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경상남도 거창군 매학(梅鶴) 일대에서 일본군 70여 명과 교전하였다. 3월 25일에는 휘하의 의병 60여 명과 무주군 횡천면 삼공리에서 일본군 영동 수비대와 2시간 동안 교전을 벌였다. 또한 공주·회덕·진산·금산·용담 등지에서도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문태서는 1907년 말 덕유산 일대 산포수들을 규합하여 무주군 안성면 소재 원통사(圓通寺)를 근거지로 삼아 의병 활동에 들어갔다. 의진의 명칭을 ‘호남 의병단’이라 칭하고 1908년 초부터 덕유산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경상남도의 함양·거창, 전라북도의 장수·무주·진안·임실·금산 등지를 오가며 덕유산·적상산(赤裳山)·성수산 등의 산악 지대를 무대로 60여 회에 걸쳐 일제의 군경(軍警)을 상대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1908년 2월 28일 이종성을 선봉으로 삼아 60명의 의병을 이끌고 무주 주재소를 습격하여 상당수의 적을 사살하였다. 일제 군경의 반격을 받아 체포되었지만 극적으로 탈출하였다. 1908년 4월 10일 신명선 의병 부대와 연합하여 장수를 습격하고 주재소와 군청 등의 관공서를 방화한 다음 무주로 철수하였다. 철수 도중 신명선 의병 부대는 일본군 수비대의 기습을 받아 전멸하였으나 1908년 11월 경상남도 안의와 거창 등지에서 다시 모병하여 무주, 장수, 거창, 함양 등지를 무대로 소부대로 분산하여 산발적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문태서는 1911년 8월 고향을 찾았다가 체포되어 1913년 2월 옥중에서 자결하였다.

박춘실은 1906년 최익현(崔益鉉) 의병 부대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무주 지역과 장수, 진안과 용담 등지를 근거로 의병을 모집하여 항전하였다. 1906년 9월 문태서 의병 부대에 합류하여 선봉장으로 무주와 장수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1913년 일본군의 소위 덕유산 소탕 작전 당시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았다. 박춘실은 수감 중 탈출을 시도하다 1914년 6월 3일 벽돌담에 스스로 머리를 찧고 자결하였다.

무주 지역 출신으로 대한 제국 시위대에 속하였던 신명선은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덕유산을 거점으로 동지를 규합하여 의병 부대를 조직하였다. 김동신, 이석용, 문태서 등의 의병대와 연합하여 무주·진안·임실·순창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문태서의 의병 부대와 함께 장수를 습격하고 돌아오다가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무주의 칠연 계곡(七淵溪谷)에서 전사하였다.

무주군 무풍면 은산리에서 태어난 이병렬은 1905년 을사 늑약 이후 덕유산에 들어가 의병대를 조직하였다. 초기에는 무주·진안·장수의 산악 지역을 중심으로 유격전을 전개하였고, 1908년 문태서 의병 부대, 신명선 의병 부대와 연합하여 활동하였다. 2년여 동안 덕유산을 거점으로 활동하다가 1909년 11월 무주군 무풍현 현내리 거문들 마을에서 일본군과 전투 도중 전사하였다.

이 외에도 유종환, 이종복, 이종성(李鍾誠), 이팔문(李八文), 임익상(林翊相), 장광옥(張光玉), 장군선(張君先) 등 많은 인물들이 독자적으로 또는 다른 의병 부대에 종군하여 의병 운동을 전개하였다.

[무주 지역 의병 활동의 특징과 의미]

무주 지역 의병들은 덕유산을 끼고 영남과 인접해 있는 무주군의 지역적 특성을 이용하여 호남과 영남을 오가면서 활동하였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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