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5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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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嶠 |
영어공식명칭 | Gim Gyo |
이칭/별칭 | 고경(高卿),양양(良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남석 |
출생 시기/일시 | 1428년 - 김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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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50년 - 김교 무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460년 - 김교 사복시 윤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67년 - 김교 오림군 책봉 |
활동 시기/일시 | 1471년 - 김교 좌리공신 4등 책훈 |
몰년 시기/일시 | 1480년 - 김교 사망 |
묘소|단소 | 김교 묘소 -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예덕로 57[석우리 산138-2]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선산(善山) |
대표 관직 | 충청도 수군절도사|평안도 관찰사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에 묘소와 신도비가 있는 조선 전기의 무신.
[개설]
김교(金嶠)[1428~1480]는 조선 초기 여진 정벌에 큰 공을 세웠고,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무신이며 어린 성종을 왕으로 옹립한 공신이다. 평양 감사로 재직 중 사망하였다.
[가계]
김교의 본관은 선산(善山)이며, 자는 고경(高卿), 시호는 양양(良襄)이다. 아버지는 일선 부원군(一善府院君) 김시로(金時露)이다. 무과에 급제한 김숭(金嵩)·김찬(金巑)·김아(金峨)·김기(金崎)·김호(金岵) 등이 동생이다.
[활동 사항]
김교는 어려서부터 무술에 뛰어나 1450년(세종 32)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1457년(세조 3)에 무과 중시에 합격하여 훈련원 판관을 역임한 후 부호군에 올랐다. 김교는 신숙주의 군관으로 모련위의 야인[여진족] 정벌에 공을 세워 1460년(세조 6) 사복시 윤(司僕寺尹)이 되었다. 그 뒤 종성 절제사, 길주 목사, 경원 부사, 충청도 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했다.
김교는 1467년(세조 13) 5월 아버지가 사망하자 충청도 홍주(洪州)[현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에 내려가 머무르다가 만포 절제사로 복직되었다.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강순의 비장으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고, 경원 도호부사 겸 경원진 병마첨절제사가 되고 오림군(烏林君)에 봉해졌다. 이어 회령 도호부사,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지중추부사로서 내직으로 들어와 선산군(善山君)으로 개봉(改封)[책봉한 것을 다시 고쳐서 책봉]되었다.
김교는 1471년(성종 2)에 어린 성종을 옹립하는 데 공을 세워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훈되었고, 그해 7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지중추부사·공조 판서·평안도 절도사와 평안도 관찰사 등을 거쳐 평안도 병사가 되었다. 1479년(성종 10) 4월 명나라의 요청으로 건주 야인을 토벌할 때 도원수 윤필상과 함께 부원수로 출전하여 공을 세우고 명나라 황제로부터 은대(銀帶)를 하사받았으며, 평안도 감사로 있다가 사망하였다.
[묘소]
김교의 묘소는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예덕로 57[석우리 산138-2]에 있는 김교 신도비의 뒤편으로 약 50m 정도 올라가면 있다. 원래 경기도 시흥시 신림동에 있었는데 도시 개발로 인해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김교는 1467년(세조 13) 적개공신에 녹훈되었으며, 오림군에 봉해졌다가 선산군으로 고쳐졌다. 또한 성종이 즉위했을 때 홍화 좌리공신(弘化佐理功臣)에 책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