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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려집』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501333
한자 草廬集
영어공식명칭 Choryeojip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문헌/전적
지역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순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간행 시기/일시 1865년연표보기 - 『초려집』 간행
간행 시기/일시 1973년 - 『초려집』 중간본 간행
간행 시기/일시 1984년 - 『초려 전집』 한남 대학교 충청 문화 연구소 영인본 발행
소장처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신림동 산56-1]
소장처 한국학 중앙 연구원 장서각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운중동 490-8]
소장처 성균관 대학교 중앙 도서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성균관로 25-2[명륜3가 53-21]
간행처 한남 대학교 충청 문화 연구소 - 대전광역시 대덕구 한남로 70[오정동 133]
성격 시문집
저자 이유태
편자 이단성|임성주|김지행|김정묵|이경
간행자 이경
권책 30권 16책[초간본]|35권 18책[중간본]

[정의]

조선 후기 무주로 이거한 문신 이유태의 시문집.

[저자]

이유태(李惟泰)[1607~1684]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태지(泰之), 호는 초려(草廬)이다. 할아버지는 선공감 봉사(繕工監奉事) 이대방(李大邦)이고, 아버지는 증참판(贈參判) 이서(李曙)이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에게 나아가 학문을 닦았으며,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을 따라 『상례 비요(喪禮備要)』를 교정하였다. 유일(遺逸)로서 천거를 받아 인조 때 세자 사부(世子師傅)를 지내고, 효종 즉위 후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과 함께 북벌 계획(北伐計劃)에 참여하였다. 1675년(숙종 1)에 복상 문제(服喪問題)로 제2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대사헌인 윤휴(尹鑴) 등 남인(南人)의 배척을 받아 영변(寧邊)에 유배되었다. 사면되어 돌아온 후는 동학사(東鶴寺)와 서대산(西臺山) 등지에서 동지들과 모여 향약을 만들었고, 후학(後學)을 양성하는 데 힘을 썼다. 사후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금산 서원(錦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편찬/간행 경위]

『초려집(草廬集)』은 초간본(初刊本), 중간본(重刊本), 3차본으로 구분할 수 있다. 초간본은 이유태가 죽은 뒤에 손자인 이단성(李端誠)이 집안에 보관하던 시문을 모으고 연보를 편찬하던 중 세상을 떠나자, 그 뒤 5세손[이름 미상]이 임성주(任聖周)[1711~1788]와 김지행(金砥行)[1716~1774]의 교정을 거쳐 17책으로 산정하였다. 이후 다시 김정묵(金正默)[1739~1799]의 산정을 거쳐 보관하던 중, 7세손 이경(李鏡)이 다시 유고를 수습하여 14책으로 정리한 뒤 1865년 26권 14책의 목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중간본은 초간본을 간행한 지 100여 년이 지난 1973년에 초간 때 누락된 「사서 문답(四書問答)」과 정훈(庭訓)·연보(年譜) 등이 증보되어 35권 18책의 석인본(石印本)으로 간행하였다. 3차본은 1984년에 중간본을 저본으로 하고, 육필본이나 당시의 필사본으로 대체하는 등 빠진 것을 보완하여 한남 대학교 충청 문화 연구소에서 『초려 전집(草廬全集)』 상·하 2권으로 영인(影印)하여 발간하였다.

[형태/서지]

초간본은 원집 26권 14책이며, 연보 4권 2책을 합하여 모두 30권 16책으로서 목활자본이다. 중간본은 35권 18책으로 석인본(石印本)이다. 3차본은 중간본을 저본으로 한 영인본이다. 초간본은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과 한국학 중앙 연구원 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중간본은 성균관 대학교 중앙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유태의 시문을 집대성한 3차본을 대상으로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권1은 시(詩) 451수를 수록하였는데 5언 율시 106수, 7언 율시 345수이다. 권2~5는 소(疏) 116편이 수록되었는데, 그중 「기해 봉사(己亥封事)」는 2만 9000여 자의 장문으로서 시폐(時弊)를 열거하고 그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권6~13은 서(書) 740여 편, 권14는 제문(祭文), 권15는 묘문(墓文)으로 구성되었으며, 권16은 「예변(禮辨)」 15편, 권17은 「의례 문답(疑禮問答)」·「경의 문답(經義問答)」 등 38조, 권18은 「시의 문답」 등 36조, 권19는 「역설(易說)」 9편, 잡저 24편, 권20은 「사례 홀기(四禮笏記)」를 수록하였다. 나머지는 정훈(庭訓) 1권 14조목과 「사서 답문」 8권, 「심경 현토 석의(心經懸吐釋義)」 2권, 연보(年譜) 4권, 가장(家狀) 1권, 부록 2권, 「문산 문답」 2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이유태는 무주 덕유산 아래 산미촌에서 학자들과 도의를 닦고 많은 제자를 길러내어 고을의 풍속을 교화하는 데 큰 공이 있다. 특히,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은 학자로서 예학과 관련된 글을 많이 남겼는데, 『초려집』에 실려 있는 「예변」이나 「의례 문답」 등을 통해 조선 중기 유학자들의 예학의 깊이와 규모를 엿볼 수 있으며, 숙종 조 복제 예송(服制禮訟) 사건의 전말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병자호란 이후 부국강병을 꾀하기 위해 당시의 폐단을 열거하고 그 대안을 제시한 「기해 봉사」는 이율곡의 경세학을 계승·발전시킨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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