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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500893
한자 改新敎
영어공식명칭 Presbyterian Church
이칭/별칭 신교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현내로 238[현내리 313-7]|부남면 대티길 53-2[대유리 136-1]|설천면 구천동로 940[삼공리 716]|무주읍 단천로 71[읍내리 799]|적상면 여용로 70[삼가리 1665-2]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천식

[정의]

전라북도 무주군에서 활동하는 기독교의 한 분파.

[개설]

개신교라 함은 1세기 초에 팔레스타인 북부 갈릴리 지역에서 활동하던 예수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의 종교이다. 본래는 기독교라는 하나의 교명으로 통용되었다. 기독교라는 명칭은 ‘크리스티아누스’라는 헬라어에서 유래되었는데, 그 의미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다[『기독교 사전』, 한영제 편].

개신교는 16세기 초 유럽에서 중세 로마 가톨릭의 교의(敎義)와 제의(祭儀)에 반대하여 새로 일어난 종교 단체 및 분파이다. 개신교, 즉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이라는 교명은 1517년 루터가 교황에 대한 반박문 게시를 통해 종교 개혁이 거세지자 가톨릭 쪽의 카롤 5세가 1529년 독일 쉬파이어 의회를 소집하였을 때 가톨릭 제후들이 루터파에 대한 관용 정책을 폐기시키자 루터파 제후들이 그 결정에 불복한 데서 유래되었다.

특히 결정적으로 16세기 교황의 부패로 인한 면죄부 판매 등 가톨릭의 정책에 반대한 루터·칼뱅·쯔빙글리 등 종교 개혁가들에 의해 가톨릭에서 분리되었다. 이로 인해 기독교는 구교[천주교]와 신교[개신교]로 불리게 되었다. 개신교는 그리스 정교회와 더불어 기독교 3대 교파의 하나가 되었다.

한국의 개신교는 시기적으로 볼 때, 중국 만주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스코틀랜드 출신 존 로스(John Ross) 선교사로부터 전도를 받고 1879년(고종 16) 세례를 받은 백홍준·이응찬·김진기·이성하 4명이 최초의 개신교 신자가 되었고 이후 서상륜은 1884년(고종 21) 황해도 장연에 교회를 세웠는데 이를 첫 번째 개신교 전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884년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 알렌이 한국에 입국하였으나 당시 한국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신분을 감추고 의사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884년 12월에 갑신정변(甲申政變)이 발발하였고 이때 중상을 입은 명성 황후(明成皇后)의 조카 민영익(閔泳翊)의 생명을 구해 고종(高宗)명성 황후의 신뢰를 얻게 되었다. 이의 영향으로 미국 선교사가 한국에 오게 되었다. 따라서 공식적으로는 1885년(고종 22) 제물포 항구를 통해 입국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에 의해 개신교가 전파되었다.

[개신교의 무주 지역 전래]

무주 지역의 개신교 전래에 앞서 호남 지역 전주에 선교사들이 오게 되며, 이들은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송한 루이스 보이드 테이트(Lewis Boyd Tate)[1862~1929]·메리 레이번(Mary Leyburn)·윌리엄 맥클리리 전킨(William McCleery Junkin)·펫시 볼링(Patsy Bolling)·마티 새뮤얼 테이트(Mattie Samuel Tate)·리니 데이비스(Linnie Davis)·윌리엄 데이비스 레이놀즈(William Davis Leynolds) 7명이다. 호남 지역 최초의 선교사들인 이들을 일컬어 ‘7인의 선발대’라 한다. 7인의 선발대는 1891년(고종 28) 한국 선교사로 활동하던 언더우드 선교사가 안식년으로 귀국하여 미국 시카고 매코믹 신학교에서 한 강연을 듣고 감동을 받은 테이트의 주도로 결성되었다. 호남 지역에 기독교가 전파된 것은 1893년(고종 30)부터이다. 1893년 서울에서 열린 미션 공의회에서 호남 지역을 선교구로 정한 바 그 결의에 따라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송된 루이스 보이드 테이트[한국명 최의덕]를 비롯한 7인의 선발대가 1894년(고종 31)부터 전주에 상주하면서 선교부[Jeonju Station]를 세우고 개신교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무주 지역 개신교는 1904년(고종 41) 미국 남장로교 루터 올리버 맥커친(Luther Oliver McCutchen)[1875~1960] 선교사에 의해 전래되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전주와 인근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하던 중 한국명이 마로덕인 맥커친 선교사가 1903년(고종 40) 말 전주에 부임하였고 이듬해부터 전주 북동부 지역을 맡아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현재는 진안 무주 가는 길이 잘 뚫려 있지만 100년 전을 생각해보면 진안 고갯마루를 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마로덕 선교사는 험난한 재를 넘어 진안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도착한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에 세동 교회를 세움으로써 진안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때가 1904년이다. 계속해서 마로덕 선교사는 무주 지역까지 선교 영역을 넓혀 갔다. 따라서 마로덕 선교사와 관련된 무주 지역 선교는 1904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마로덕 선교사가 선교를 주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1901년(고종 38) 무주군 무풍면 증산리[당시 석항리]에는 이미 이경문, 오태근 성도가 인도하는 자생 신앙 공동체가 있었다[무풍 교회 이석하 장로 증언]. 또한 한국 목사로 이 지역 복음화에 공헌을 한 김필수 목사가 있고 선교사로는 엘머 티머시 보이어(Elmer Timothy Boyer)[한국명 보이열], 윌럼 먼로 클락(Willam Monroe Clark)[한국명 강운림] 선교사 등이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전후까지 진안 무주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다. 1904년부터 마로덕 선교사는 전주를 기준으로 동북 지역인 완주군 일대와 진안·장수·무주, 그리고 동남 지역인 임실·남원 등 선교 대상 지역이 광범위하였다. 마로덕 선교사는 넓은 지역을 감당하느라 지쳐서 여러 차례 자리에 눕기도 하였다.

이후 보이열 선교사 활동 시기에 지역을 두 개로 분리하였다. 처음의 ‘전주 동남 시찰’이었던 것을 하나는 명칭을 ‘전주 남지방 시찰’이라 하고 구역은 남원·임실 일원과 장수·진안, 그리고 전주 일부로 하였다. 또 다른 시찰은 명칭을 ‘전주 동지방 시찰’이라 하고 구역은 무주 일원과 장수·진안·전주 일원을 대상 지역으로 하였다[1937년 5월 5일 결의]. 현재는 무주·진안·장수를 포함하여 전북 동노회라 칭하고 있다. 노회(老會)[Presbytery]는 장로교회 입법과 사법의 역할을 담당하는, 지역의 중추적 기관이다. 무주 노회라고 하면 무주 지역 내에 있는 소속 교단 모든 교회들에 대해 감독권을 행사하고 교회를 맡아 볼 목회자를 취임시키며, 교회 관련 청원서를 상부 기관인 총회에 회송하는 일과 건의하는 일 등을 맡아 한다.

[무주 지역의 개신교 현황]

무주 지역의 개신 교회는 장로교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장로교단으로는 예수교 장로회와 기독교 장로회가 있는데, 예수교 장로회에는 합동과 통합 두 개의 교단[종파]이 있다. 합동 측 장로교회로는 대유 제일 교회를 포함하여 8개 교회가 있고 통합 측 교회로는 구천동 교회를 포함하여 30개가 있다. 기타 기독교 침례회 소속 세 개 교회, 기독교 대한 감리회 소속 두 개 교회, 기독교 장로교회와 기독교 성결 교회와 백석 장로회 교회 각각 한 개 등 무주 지역에 총 50여 개의 교회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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