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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500718
한자 朴春實
영어공식명칭 Bak Chunsil
이칭/별칭 박동식(朴東植)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무주군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혜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5년연표보기 - 박춘실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6년 - 박춘실, 최익현 순창 거의에 참가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박춘실, 문태수 의병 부대와 연합
활동 시기/일시 1908년 - 박춘실 무주 구천동에서 일본군 헌병대와 교전
활동 시기/일시 1909년 5월 8일 - 박춘실 일본군에 체포
활동 시기/일시 1909년 7월 17일 - 박춘실 교수형 선고 받음
몰년 시기/일시 1914년연표보기 - 박춘실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박춘실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장수군 - 전라북도 장수군 계북면 임평리 백암
활동지 무주군 - 전라북도 무주군

[정의]

개항기 무주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활동 사항]

박춘실(朴春實)[1875~1914]의 본관은 밀양(密陽), 본명은 박동식(朴東植)이다. 1905년(고종 42)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비분강개하여 전라북도 진안군 용담에서 “국가 존망의 이때 모두 분발하여 사심을 버리고 나라를 구하자.”는 내용의 창의(倡義) 격문을 돌렸다. 이러한 격문을 보고 모여든 의병 52명을 이끌고 용담 구봉산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6년 최익현(崔益鉉)의 순창 거의(擧義)에 참가하였으며, 최익현이 체포된 후 고향으로 돌아와 동지 몇 명과 함께 용담 구봉산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하여 무기를 노획하였다. 1907년 가을, 문태서(文泰瑞) 의병 부대와 연합하고 이어 박수문 의진을 모아 호남 의병단을 조직하였다. 호남 의병단의 선봉장이 된 박춘실덕유산(德裕山)을 거점으로 본격적인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장수와 무주 일대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으며, 이듬해 13도 연합 의진의 서울 진공(進攻)이 있을 때에 호남 창의 대장으로 양주까지 진출하여 참전하기도 하였다.

1908년(순종 2) 무주 구천동(茂朱九千洞)에서 일본군 헌병대와 교전하는 등 1909년 3월까지 진안군 천반산(天盤山)과 성수산(聖壽山), 장수군 덕유산, 무주군 적상산(赤裳山), 토옥동(土沃洞) 문성어전(文城於田), 농수리(農水里), 양악(陽岳), 진도리(眞道里) 등지에서 60여 차례 교전하였다. 1909년 5월 6일 수비 대장 조사(鳥飼) 대위가 이끄는 토벌대 30명이 장계(長溪) 등지로 출동하였다. 5월 8일 오후 130명의 동지와 문성동 북쪽에 떨어진 산중에 이르러 적군과 교전하던 중 의병 13명이 순국하고 박춘실은 체포되었다. 1909년 7월 17일 교수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14년 전주 형무소를 탈옥하려다 실패하였다. 그 후 대구 형무소로 이감되어 복역하다 감방의 벽을 파괴하고 동지 100여 명을 탈옥시킨 후 본인은 자진하여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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