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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산성과 아주고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501192
한자 茂山城-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
집필자 김영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2년 - 「무산성과 아주고개」, 『내 고장 전설집』에 수록
관련 지명 무산성 -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
관련 지명 아주고개 -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
성격 설화|지명 유래 전설
주요 등장 인물 견훤|궁예|왕건
모티프 유형 후삼국 견훤의 패배|지명 유래

[정의]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에서 무산성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무산성과 아주고개」는 후삼국의 견훤(甄萱)[867~936]이 무산성(茂山城)을 차지하려고 싸우다가 패배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모반죄를 지은 사람들이 처형장으로 아주 가 버리고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이들이 넘었던 고개를 ‘아주고개’라 하였다는 지명 유래 전설이다.

[채록/수집 상황]

「무산성과 아주고개」는 1992년 김경석이 편찬하고 무주군에서 간행한 『내 고장 전설집』의 68~69쪽에 수록되어 있다. 정확한 채록 시기는 미상이다.

[내용]

통일 신라 말, 완산주[지금의 전주]를 중심으로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고, 궁예는 고구려 땅에서 일어나 후고구려라고 국호를 정하고 서로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였다. 지금의 나제 통문 동편에 있던 무산성은 삼국 시대부터 신라와 백제의 경계를 이루던 곳으로 신라의 변방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충지였다. 견훤은 920년(신라 경애왕 4)에 대야성을 함락하고 북상하여 무산성과 단천성[후에 주계]을 친 후 진례성[지금의 금산]을 점령할 목적으로 대덕산을 공략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산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고, 신라 군대와 후백제 견훤 군대는 많은 희생자를 내며 계속 싸우고 있었다.

그러자 단천현에서도 관군[신라군]을 무산성으로 보내 견훤의 군사를 막도록 무산성 군사를 도왔다. 그러나 원래 단천성은 백제의 영토였기에 단천에서 파견된 병사들 가운데는 옛 백제 재건을 꿈꾸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은 견훤의 군사와 몰래 내통하여 무산성 함락을 도모했다. 무산성이 위기에 처하자 신라는 고려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왕건이 대군을 이끌고 단천현에 오게 되었다. 견훤은 완산주로 회군하였고, 아들의 모반으로 위협을 느끼자 마침내 고려에 항복했다.

이후 후삼국이 통일된 후 무산성에서는 과거에 견훤의 군사와 몰래 내통한 사람들을 모반죄로 처형했다. 무산현 관아에서는 호봉사의 산 너머에 처형장을 마련했는데, 사람들이 처형장으로 끌려갈 때 넘었던 고개를 ‘아주고개’라고 한다. 한번 간 사람들은 아주 가 버리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모티프 분석]

「무산성과 아주고개」의 주요 모티프는 ‘후삼국 견훤의 패배’, ‘지명 유래’ 등이다. 역사 전설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민중의 여망이 반영된 이야기로 꾸며진다는 점을 고려할 때, 백제와 신라의 경계 지역이었던 무주군 무풍면에 전해 내려오는 「무산성과 아주고개」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성을 따지기 전에 충분히 개연성을 확보할 수 있겠다. 「무산성과 아주고개」에는 견훤에게 끝까지 무산성을 내주지 않았다는 무풍 사람들의 자부심과,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으로 고개 너머에서 처형되어 아주 가 버렸다는 안타까움이 공존하는 설화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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