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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500613
한자 遊廬山行
영어공식명칭 Yuyeosanhaeng
이칭/별칭 「유광려 산행기」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전라북도 무주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철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732년연표보기 - 「유여산행」 저술
성격 기행문
작가 윤증

[정의]

조선 후기 학자 윤증이 무주의 덕유산을 기행하고 그 내용을 기록한 글.

[개설]

덕유산은 남쪽의 명산으로 오래전부터 이름나 있었던 듯하다. 1652년이면 윤증(尹拯)의 나이 24세가 된 때이다. 글 첫부분에 '내 평생 몸이 약해'라고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티끌 세상 싫어하고 오직 물과 돌밖에 몰랐다'라고 한 것처럼, 실제로 윤증은 36세에 학문이 뛰어나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고, 이후 85세로 세상을 마칠 때까지 우의정을 비롯하여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1652년을 전후하여 송시열(宋時烈)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부쳤고,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윤증윤휴(尹鑴)가 『중용(中庸)』에 새로운 주석을 붙인 것에 대하여 옹호하는 입장을 폈다.

이 시기 덕유산의 산승과 형용할 수 없는 빼어난 경승은 찾는 이를 위로하였는데, 윤증은 '허구한 세상만사 생각이 전혀 없고 암혈에서 도를 닦는 중들이 부럽다'라며 소회를 적고 있다. 덕유산을 노래한 미수(眉叟) 허목(許穆)이나 19세기 활동했던 회덕(懷德)의 송병선(宋秉璿) 또한 「덕유산기」를 남겼는데, 송병선이 '덕유산은 흙산으로 후덕한 군자의 덕이 있는 모습과 같았다'라고 한 것처럼 덕유산은 은자가 살고 은자가 머무는 곳으로, 선비들이 그리워 하는 산으로서 칭송받은 것으로 보인다.

[구성]

「유여산행(遊廬山行)」윤증이 1652년 4월 하순 무렵 3일간 덕유산(德裕山)을 기행한 뒤, 기행 일정과 소회를 적은 장편 시문이다. 「유여산행」윤증의 시문집인 『명재 유고(明齋遺稿)』 1권, 시(詩)에 실려 있다. 기본적으로 7언시의 형식이지만 부(賦)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유여산행」은 산문의 형식을 취하여 눈앞의 경치 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유광려 산행기(遊匡廬山行記)」라고도 부른다.

[내용]

「유여산행」을 살펴보면 윤증은 원적사(圓寂寺) 터, 남암(南庵)을 지나 백련암(白蓮庵)에서 하룻밤을 묵고, 계조굴에서 월산 계주를 만난 후에 향적암을 지나 향적봉에 올랐다. 그리고 다시 백운암(白雲庵) 터, 원통사(圓通寺)를 거쳐 하산하였다. 산행을 시작하면서부터 작가의 감동이 시작된다. 몸이 약해 세상 여행을 생각하지 못했다가 산골짝 길을 따라 걷는 기분은 ‘미투리며 죽장에 행장을 챙기고 바라보니 맑은 흥취 억제하지 못할’ 정도라고 표현되었다. 숲속에 자리한 작은 암자에서 식사를 하고 잠을 청하면서도 하늘의 움직임마저 감동을 받을 정도라고 하였다.

둘째 날 아침, 인적이 끊겨 황폐해진 원적사 터를 지나 구천동 넓은 곳에 자리잡은 백운사에서는 불도들이 무리를 지어 불경을 외우는 모습을 목도하게 된다. 이곳까지 도달하는 길이 꽤 힘들었던지 사미승이 내온 차는 경옥고와 같을 정도라고 감탄하였다. 잠시의 여유로 피로를 푼 뒤 정상을 향한 산행은 계속되었고, 울창한 전나무와 잣나무 숲속에서 폐허가 된 향적사의 모습을 확인하였다. 정상에 올라 눈앞이 확 트이고 시야가 넓어지면서 가야산, 대둔산, 그리고 남쪽 끝에는 두류산이 한눈에 들어와 ‘한유(韓愈)와 같은 대문장이 힘을 다해 쓴다 해도 이 모두를 형용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감탄하기도 하였다. 내려오는 길에 진달래가 한창이었고, 구불구불 길을 따라 백운암 터를 지나 돌아본 길은 구름 속에 봉우리들이 완연히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암혈에서 도를 닦는 중들이 부러운 마음’을 옷을 털 듯 마음을 다잡고 나오는 길에 만난 ‘졸졸졸 사람 따라 흘러오는 시냇물’은 사행을 마치고 아쉽게 돌아서는 작가의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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