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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501362
한자 -向-所望-祈願-山義-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내도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상훈

[정의]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내도리 산의마을에서 행해지고 있는 짐대제.

[개설]

산의실[산의곡(山義谷)] 마을이라고도 불리는 산의마을에서는 매년 내도리 산의마을 짐대제가 지금도 행해지고 있다. 본래 음력 정월 초사흗날 저녁 내도리 산의 산신제를 지낸 후에 짐대를 만들어 짐대제를 모셨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제관 되기를 기피하는 경향이 늘자 2006년부터 내도리 산의 산신제북고사(北固寺) 스님에게 위임하여 음력 정월 초사흗날에 지내고 있다. 그리고 내도리 산의마을 짐대제는 음력 정월 대보름날 오전에 짐대를 세우면서 액운을 방지하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모시고 있다.

[산 속 깊숙이 자리 잡은 산의마을]

산의마을무주군 무주읍 내도리에 속한 자연 마을이다. 무주읍 내도리는 본래 북변 지역인데 1914년 내동(內洞), 산의곡, 굴천(屈川), 후도(後島)[뒷섬] 일부 및 금산군 부동면의 굴천과 금동 일부를 병합하고, 내동에서 ‘내’자, 후도에서 ‘도’자를 따서 ‘내도리’라 이름하고 무주읍에 편입시켰다. 내도리에는 내동[안골], 거래대[巨里垈], 굴천, 산의실, 지내(池內)[방죽안], 후도, 전도(前島)[앞섬], 새터[新基][거리대 동쪽 마을] 등의 자연 마을이 있다.

무주군 무주읍 내도리에 속한 산의마을은 충청남도 금산군 부리면,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의 경계가 되는 3개 도의 접경 지역에 있다. 그리고 둥글게 휘감아 나가는 물줄기 양쪽에 앞섬[전도]과 뒷섬[후도] 등이 있으며, 이 두 마을 뒤쪽에 산의마을이 있다. ‘산의’라 붙여진 연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산의마을은 입지가 겹겹이 산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 붙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즉 산속 깊숙이 자리 잡은 마을을 일컫는다. 산의는 ‘굴천 조씨’라 알려진 ‘함안 조씨’가 터를 잡아 마을로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 뒤로 청주 한씨, 김해 김씨, 고성 김씨, 평산 신씨 등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 마을 서북쪽에는 노고성(老姑城)이 있는데, 이는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출병한 자식들의 무운(武運)을 빌기 위해 어머니들이 치마폭으로 돌을 날라서 단(壇)을 쌓았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산의마을의 주민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최근에 과수와 인삼 재배를 하고 있다.

[뿌리 깊은 마을 신앙이 남아 있는 산의마을]

산의마을은 몇 차례 방문했지만 언제나 과거 속으로 찾아가는 느낌이다. 군내 버스를 타고 가는 산의마을은 굽이굽이 휘돌아 가는 하얀 금강을 지나간다. 앞섬과 뒷섬을 지나 찾아가는 산의마을은 지금도 산신제와 짐대제를 지내고 있다.

내도리 산의 산신제는 마을에서 상당히 떨어진 마을 뒷산에 있는 산제당에서 모신다. 본래 산제당은 신목과 바위로 이루어졌으나 신목인 소나무가 고사하여 현재는 2m 정도 크기의 바위에서 모신다. 이곳에는 제물을 직접 장만할 옹기, 솥단지 등 제기(祭器)가 있다. 산제당 근처에 있는 샘물을 이용해서 메를 짓고 미역국을 끓인다. 제물 중 두 가지는 이곳에서 직접 짓는다.

내도리 산의 산신제는 음력 정월 초사흗날 밤에 모신다. 한때 음력 정월 열 나흗날이나 음력 정월 초하룻날에 모시기도 했다. 제관(祭官)은 부정이 없고 깨끗한 사람으로 선정하였다. 제관은 산신제를 지내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하여 아들을 원하는 사람이 나서기도 했다. 그런데 제사를 주관하려면 부정한 일을 하지 않아야 되기 때문에 제관하기를 꺼려해서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지냈다. 즉 1990년 무렵에 다섯 집을 묶어서 제관을 선발하였다. 이를 ‘삽짝[사립짝] 돌림’이라 한다. 그러다가 2006년부터는 북고사 스님에게 맡겨 산신제를 지내 오고 있다. 제사 비용은 동답이 있어 여기에서 나온 비용으로 충당한다. 보통 쌀 한 가마니 정도 소요된다. 요사이 북고사 스님께는 15만 원 정도 드린다고 한다.

제물(祭物)은 돼지머리를 비롯하여 삼색실과, 통북어, 나물, 3탕 등을 준비한다. 그리고 밥 등은 산제당 샘물을 이용하여 직접 짓는다. 제물을 진설(陳設)하고 산신제를 모신다. 제는 일반적으로 유교식 절차에 따라 대개 진설, 재배(再拜), 헌작(獻爵), 재배, 소지(燒紙), 음복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축문은 전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고, 소지를 올린다. 소지는 마을의 평안을 축원하는 대동 소지를 먼저 올리고 함안 조씨, 청주 한씨, 평산 신씨 등 각 성씨별로 한데 묶어서 소지를 올린다. 산신제를 마친 후에 짐대제를 모신다.

[무주군에서 유일하게 전승되고 있는 산의 짐대제]

짐대는 가늘고 긴 나무나 돌 윗부분에 새를 한두 마리 올려놓고 단독으로 세우거나, 장승과 함께 마을 입구나 신성한 장소에 세워서 마을에 들어오는 질병 및 화마, 액운을 방지하고자 마을 수호신으로 신앙화된 민속 신앙물이다. 짐대는 진대, 거오기, 수살막이대, 까마귀, 철통, 솟대, 솔대, 별신대, 영동대, 화줏대, 거릿대, 오릿대, 볏가릿대 등 다양한 명칭으로 전해진다.

짐대는 일반적으로 마을 액막이[마을 수호·화재 예방·풍농·풍요·기자 등을 위해서 세우는 짐대]의 목적을 위해 세워지거나, 마을의 행주형(行舟形) 지세(地勢)를 보완하기 위하여 세워지거나, 급제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우기도 한다. 짐대의 명칭은 매우 다양하다. 솟대[속대·솔대라고 불리는 ‘솟아 있는 장대’], 짐대[진대·불교 사찰 당산·선대·돗대 등이라고 불리며, 행주형 지세의 마을에 세우는 돛대는 짐대로 인식], 오리[물새로서 성격 강조하면 보통 오리라 칭함], 수살대[마을의 액막이로서 역할], 낫가릿대[풍농을 기원], 화줏대[급제·입신양명 등을 기념하기 위해서 붙여진 명칭], 당산, 별신대[신앙 대상물] 등으로 불린다.

무주 지역의 경우에는 짐대, 돛대 등으로 불린다. 흔히 짐대를 솟대라 칭하는데, 무주 지역의 경우에 마을 현장 속에서는 그 명칭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솟대를 학문적 용어라고 말한다면, 짐대는 민속 현장의 용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짐대란 용어는 진대로서 어떤 곳에 기운이 강하면 그곳을 눌러 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풍수 비보적 명칭으로 생각된다. 행주형 지세와 관련해서 무주군 부남면 대유리무주군 무풍면 증산리사동 마을에서는 돛대라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은 없지만 예전에 짐대가 세워진 곳을 일컬어 짐대거리, 오릿대거리 등으로 부르는 지명이 남아 있기도 하다. 현재 무주군에서는 유일하게 산의마을에서 짐대가 매년 세워지고 짐대제가 행하여지고 있다.

[산의 짐대 이렇게 만들어진다]

산의 짐대제를 지내기 전날 짐대를 제작한다. 보통 짐대는 나무나 돌로 만드는데, 나무인 경우에는 대체로 밤나무, 참나무, 소나무, 낙엽송 등을 사용하며, 돌인 경우는 화강암을 선택한다. 2017년에는 산의마을 뒷산에서 낙엽송을 잘라 짐대 기둥을 준비했다. 낙엽송을 선택하는 이유는 나무의 재질이 단단하기 때문이다. 짐대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선택하는 것도 부정을 타면 안 되기 때문이 깨끗한 마음가짐을 지녀야 한다. 나무를 자르고, 가지를 자른 다음에 트럭에 싣고 마을로 들어온다. 마을 중심에 있는 느티나무 주변에서 작업이 진행된다. 나름대로 마을에서 목수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 참여한다.

일단 나무 기둥은 낫으로 껍질을 벗긴다. 나무껍질 하나 없이 하얀 표피가 나타나도록 벗긴다. 세 마리의 새를 올려놓기 위하여 Y자형 나무를 제작한다. 처음부터 Y형태의 나무를 잘라 역시 껍질을 벗긴다. 2017년에 세운 짐대는 낙엽송으로 제작했다. 높이 7~8m, 둘레 25㎝ 정도가 된다. 그리고 산수유나무로 ㄱ자 형태의 새를 만든다. 간단하고 가늘게 ㄱ자 형태로 만들지만 누구나 새로 인식할 수 있는 모양이다. 전에는 소나무로 제작했다고 한다. 기둥 꼭대기에 Y자형을 올려놓는데, 이때 Y자형의 중심에 홈을 내서 기둥 꼭대기에 꽂는다. 그리고 3마리의 새는 Y자형 끝머리에 3개의 홈을 파서 꽂는다. 예전에는 못을 사용하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나면 새가 빠져 나가고 해서 지금은 못을 박아 고정시킨다.

흔히 짐대 위에 올리는 새는 ‘오리’[오릿대]라고 불리는데, 산의마을에서는 ‘까마귀’라고 인식하고 있다. 보통 우리나라에서는 까마귀 하면 좋지 않은 새로 인식하고 있어 까마귀라고 부르는 곳은 흔치 않다. 그러나 산의 사람들은 까마귀를 좋은 징조를 알려 주는 길조로 여긴다. 마을 사람들은 까마귀가 높은 장대 위에 앉아 망을 보고 마을로 들어오는 흉사를 미리 알려 준다고 믿고 있다. 짐대가 완성된 후에 짐대 기둥 밑에서부터 꼭대기까지 숯을 이용하여 나선형으로 검은 선을 그린다. 이것은 ‘용틀임’을 상징한다. 평야 지역에서는 새끼줄로 표현한다. 흔히 줄다리기를 하기 전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줄을 들고 마을을 도는데, 이때 사용되는 줄도 용으로 인식한다. 우순풍조(雨順風調)를 상징하는 용에게 풍농을 기원하는 목적이 있어서이다.

그리고 짐대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보통 낫, 끌, 톱, 망치 등의 도구를 준비한다. 산의마을 주민 김병민이 주도적으로 짐대를 제작했다. 지금도 마을에 목수 일을 하는 사람이 있지만 예전에는 전문적인 목수가 많았으므로 집이나 모정을 지을 때 마을 자체에서 인력을 충원하기도 했다. 짐대를 운반하기 위해서는 3~4개의 동아줄이 필요하다. 동아줄은 지푸라기로 제법 굵게 꼰다. 그리고 운반목도 동아줄 숫자에 맞추어 준비한다. 산의마을에서는 보통 4개를 준비한다. 마을에 많은 사람이 있으면 짐대를 운반하기가 수월하다. 짐대 양쪽에서 2인 1조가 되어 6~8명이 운반한다. 이때 짐대를 제작하거나 운반하는 사람을 ‘짐대잽이’라고 부른다. 2017년 제작된 짐대 기둥은 전에 비하여 두꺼워 운반하는데 마을 분들이 힘겨워 했다. 그러나 매서운 바람이 부는 음력 정월 대보름날 오전 짐대제에 참여한 사람들은 추운 줄 몰랐다.

[산의실 짐대 제의는 이렇게 진행한다]

언제부터 산의마을 짐대가 세워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오래전부터 세워지다가 새마을 운동 무렵에 잠시 중단되었고,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하자 다시 세우게 되었다. 본래 산의 마을에서는 마을 양쪽에 2기의 짐대를 세웠다. 예전 길목과 현재 길목에 각각 세웠다. 예전 길목은 마을에서 시냇물을 따라 난 길이었다. 아래쪽에 자리 잡아 ‘아래 짐대거리’라고 불렸다. 그리고 새로운 길은 본래 길보다 위쪽에 자리 잡아 ‘위 짐대거리’라고 칭한다. ‘아래 짐대거리’는 길이 없어지면서 사라졌고, 현재는 마을로 들어가는 새로운 길목인 ‘위 짐대거리’에 매년 1기의 짐대를 세운다. 짐대를 세우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예전에는 격년제로 진행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전봇대를 사용하기도 했으나, 이제는 매년 나무 짐대를 세우고 있다.

짐대제는 음력 정월 보름날 오전에 모신다. 2017년에는 10시 30분에 시작하였다. 짐대제를 모시기 전날 마을 회관에 모여 아주머니들은 풍물 연습을 하고, 제물 준비도 한다. 마을 사람 대부분이 참여한다. 짐대제를 마을의 일로 생각하는 모습이다. 짐대제는 짐대를 마을 입구까지 운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때 풍물패도 함께한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 쓰인 깃발을 앞세워 짐대를 운반하고, 그 뒤에 풍물패가 따른다.

마을 입구 오른편에는 매년 세워진 5기의 나무 짐대가 있고, 왼편에는 2010년에 세워진 돌 짐대가 기념으로 세워져 있다. 여기에는 산의 짐대의 유래와 특징, 짐대제 연행 절차가 적혀 있다. 3개의 돌 짐대를 올려놓았는데, 산의 짐대에 올려놓은 새와 다르게 오리 형태이다. 산의마을에서 만든 나무새의 형태로 만들었다면 오랫동안 그 원형이 전승되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짐대를 세우기 위해서는 구덩이를 판다. 과거에는 구덩이에 숯과 소금을 넣었다. 이는 나무 짐대를 세울 때 나무가 썩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마을에서는 마을에 부정한 일이 있을 때 넣는데, 부정한 것을 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짐대를 세우는 것은 만만치 않는 작업이다. 마을 사람들이 대부분 연로하기 때문이다. 우선 흰 광목으로 짐대 윗부분을 둘러치고, 두 개 나무를 지렛대로 삼아 짐대를 세운다. 짐대를 세우는 것은 요령이 필요하다. 짐대를 세우는 작업은 마을 사람들이 호흡을 잘 맞춰야 한다. 짐대가 마을 사람들의 힘으로 세워지면 마치 새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 했다. 마을 사람들의 소망을 품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마을 사람들은 소망을 이렇게 매년 기원하지 않았을까?

짐대를 세우고 고정시킬 때 Y자형 위에 올린 새의 방향을 정확히 한다. 새의 방향은 동쪽, 서쪽, 남쪽을 향하고 있다. 그중에서 맨 앞에 놓인 새는 마을 앞 학봉산을 바라보고 있다. 이처럼 새의 방향을 달리한 것은 각 방향으로 들어오는 질병 및 화마, 액운을 방지하고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기 위해서다. 특히 화재막이로 세우는 경우에는 마을에서 화산이 비치는 방향으로 새의 머리를 향하도록 한다. 짐대를 고정한 다음 짐대제가 시작된다. 짐대제는 김석주[남, 79세]의 집례로 이루어졌다. 제관은 한남철[남, 75세], 집사는 김월성[남, 68세] 등이 담당하였다. 제는 유교식 절차인 진설, 재배, 헌작, 재배, 축문, 음복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제를 지내는 동안 풍물패는 연신 풍물을 울린다. 제물을 진설할 때 짐대 기둥에 통북어와 화선지를 흰 실타래로 묶는다. 이를 ‘댕이 맨다.’라고 한다. 이는 흠향(歆饗)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축문은 김석주가 준비하여 읽는다. 축문은 한자를 음으로 새겨 읽는다.

“유세차 정유 음력 정월 십오일 삭 기사 산의 주민 일동 감소고우 질병우마 속거천리 관내액운 일체소멸 우순풍조 풍년도래 만복익일 소원성취 근이첨작 서수지천 요사 상향”

짐대제를 마치면 음복을 하며 새해 소망을 축원했다. 마을 사람 모두가 마을 회관에 모인다. 올해는 추워서 생략했지만 마을 회관 앞에서 윷놀이를 하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본시 음력 정월 대보름이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큰 축제였다.

[산의 짐대제의 미래]

짐대제는 이장 한종섭이 주도적으로 진행하였다. 한종섭은 2013년부터 마을 이장을 맡아 왔는데, 산의마을의 역사를 사진 자료로 기록하고 있는 중이다. 2013년 마을 앨범을 보면, 짐대제 과정은 물론이고 마을 야유회, 마을 대청소 등 마을 행사를 꼼꼼하게 정리하고 있다. 현재 산의 짐대제는 과거와는 다르게 많은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오던 짐대제가 새마을 운동 무렵에 잠시 중단되었다가 다시 부활하였다. 이후에도 짐대를 세우지 않고 격년제로 제를 지낸다든지, 아예 전봇대로 만들어서 영구적으로 사용하기도 하는 부침이 있어 왔다. 그런데 무주 반딧불 축제 때 무주군의 민속놀이를 시연하면서 현재 매년 마을에 나무 짐대를 세우고 있으며, 반딧불 축제장에서도 짐대를 세우고 짐대제를 올리고 있다. 그래서 과거와는 다르게 풍물패가 조직되어 있으며, 여러 장의 깃발이 준비되어 전승되어 오고 있다. 민속은 시대를 반영한다. 그래서 변화는 피치 못할 상황이다. 그럼에도 원형을 살리면서 전승되는 방향을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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