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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501351
한자 -茂朱,朝鮮王朝-歷史-
영어공식명칭 The Annals of the Choson Dynast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무주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대길

[정의]

조선왕조 25대 472년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을 보존해 온 적상산 사고와 무주의 역사.

[개설]

조선(朝鮮)을 건국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부터 철종(哲宗)에 이르기까지 왕의 사후(死後)에 연월일(年月日)의 편년체(編年體)로 25대 472년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그 방대한 분량은 물론 내용에서도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역사서로 평가받고 있다. 그 결과 1973년 12월 31일 대한민국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기 위하여 아주 엄격한 규정과 체계에 따라 편찬되었다. 실록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하여 반드시 왕이 죽은 다음 작성되었으며, 임금은 어떠한 경우에도 열람할 수 없었다. 사관(史官)은 독립성과 비밀성을 부여받아 있는 그대로 사실을 기록할 수 있었고, 사관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사론(史論)을 보장하였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시대사 연구의 근본 자료가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경제·법률·문학·외교·군사·산업·교통·통신·미술·공예·종교 등 한국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역사서이다.

이처럼 귀중한 역사서를 보관하기 위하여 조선 정부는 초기부터 그 보존에 힘썼다. 이른바 사적 분장지책(史籍分場之策)을 세워 단일본이 아닌 4본을 편찬하였고, 보관 장소도 중앙과 지방으로 나누었다. 그리하여 춘추관(春秋館)의 내사고(內史庫)와 충주(忠州)·성주(星州)·전주(全州) 등 지방의 외사고(外史庫)로 나누어 4대 사고를 설치, 운영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인해 전주 사고본(全州史庫本) 『조선왕조실록』만 남고 나머지 사고의 실록이 소실되면서 보존, 관리 방식을 바꾸게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새롭게 실록을 편찬한 조선은 춘추관을 제외한 지방의 외사고를 모두 산중(山中)으로 옮기고, 수호 사찰(守護寺刹)을 두어 관원[사고 참봉]과 승려가 함께 지키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강화도 마니산(摩尼山)[정족산(鼎足山)], 강원도 오대산(五臺山), 경상도 태백산(太白山), 평안도 묘향산(妙香山)에 사고를 설치하였다. 그런데 후금(後金)이 강성해지면서 국방의 위험이 증대되자 무주 적상산(赤裳山)에 사고를 설치하고 묘향산 사고에 보관하던 실록을 옮겨 보존하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의 편찬과 보존]

조선왕조는 고려의 사례(事例)에 따라 초기부터 실록을 편찬하였다. 역대 왕의 실록 편찬에는 여러 과정과 절차가 있는데, 크게 나누어 다음 3가지로 나뉜다. 먼저 왕을 비롯하여 국가(國事)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이 있어야 하는데, 이는 사관 제도(史官制度)로 정비되었다. 다음은 왕의 서거 후에 실록청(實錄廳) 또는 찬수청(纂修廳)을 설치하여 실록을 편찬하고 사고에 봉안(奉安)하는 과정이다. 마지막으로 실록을 보존하고 관리하는 사고 제도(史庫制度)이다.

좁은 의미의 사관은 사초(史草)의 작성과 시정기(時政記)의 찬술에 전념한 예문관의 봉교(奉敎)[정 7품 2명], 대교(待敎)[정 8품 2명], 검열(檢閱)[정 9품 4명]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사관이란 이들을 말하며, 한림(翰林) 또는 전임(專任) 사관이라고 하였다. 넓은 의미의 사관은 사초를 작성하고 시정기를 찬술하는 전임 사관은 물론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에 소속된 수찬관(修撰官) 이하 편수관(編修官)·기주관(記注官)·기사관(記事官) 등도 포함되었다. 이들을 가리켜 겸춘추(兼春秋)라고 하였다.

사관의 직위는 낮았으나 직필의 고유한 기능은 물론 국왕의 측근에서 매일 근무한 까닭에 엄격한 절차를 거쳐 임명되었고, 그러기에 자부심이 강하였다. 일반적으로 문과에 급제한 유망한 신진 중에 사관으로 적합한 자를 추린 다음 ① 경사(經史)와 문장(文章)이 뛰어나고, ② 친가(親家)는 물론 외가(外家) 모두 4대조(代祖)까지 흠이 없고, ③ 인품이 공정한 자를 3배수로 선발한 다음 최종적으로 왕이 임명하였다.

실록의 편찬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왕의 승하하면 실록을 편찬하기 위하여 실록청을 설치한다. 편찬 자료를 수집하여 1차 원고인 초초(初草)를 작성하여 도청(都廳)에 넘긴다. 실록을 편찬하기 위한 자료에는 사관이 작성한 사초와 시정기는 물론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경연일기(經筵日記)』, 『각사등록(各司謄錄)』 등 정부의 모든 기관에서 작성한 문서류(文書類)는 물론 개인의 문서까지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초초를 넘겨받은 도청은 초초에서 잘못된 것은 정정하고 빠진 것은 추가하며 불필요한 것은 삭제하는 등 교열을 마친 뒤 2차 원고인 중초(中草)를 작성한다. 그 후 실록 편찬의 최고 책임자인 총재관과 도청 당상이 중초를 교열하여 문장과 체제를 통일함과 동시에 필삭을 가하여 정초(正草)를 만들었는데, 이것으로 실록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처럼 초초와 중초, 그리고 정초의 세 단계를 거쳐서 실록이 완성되면 바로 네 부를 인쇄하고, 택일(擇日)을 거쳐 먼저 춘추관 사고에 봉안하였으며, 봉안사(奉安使)를 파견하여 외사고에 봉안하였다. 실록의 기본 자료로 이용된 사관의 사초와 시정기는 물론 초초와 중초, 그리고 정초 등 모든 자료는 세검정(洗劍亭)에서 물로 씻은 뒤 세초연(洗草宴)을 가졌다. 이는 국가 기밀의 누설을 방지함과 동시에 종이를 재생하기 위함이었다.

[임진왜란과 외사고의 변화]

1592년(선조 25) 일어난 임진왜란은 우리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의 하나로 기억된다. 그런데 바로 이 전쟁으로 인해 조선의 역사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일본군의 북상로(北上路)에 있던 성주 사고(星州史庫)와 충주 사고(忠州史庫) 그리고 춘추관 사고의 실록이 모두 소실(燒失)된 것이다. 유일하게 남은 전주 사고본은 전주에서 정읍 내장산으로, 다시 아산과 강화를 거쳐 해주와 묘향산으로 이안(移安)되면서 지켜졌다. 이때 실록 지킴이로 나선 이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정읍 태인의 유생 안의(安義)손홍록(孫弘錄)이었다.

유일본 실록을 지켜 낸 조선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곧바로 복인(復印)을 서둘렀고, 그 결과 1606년(선조 39) 모두 다섯 부를 만들었다. 전주 사고본과 교정본(校訂本), 그리고 세 부의 복인본이었다. 이후 외사고를 선정하게 되는데, 조선 전기와는 달리 산중을 택하였다. 바로 마니산,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도회지에 있던 실록이 소실되고, 유일본이 된 전주 사고본 실록을 지키는 데 활용된 장소가 섬이나 산중이었으며, 일찍이 명산(名山)에 실록을 보관하였다는 고사(古事)에 따른 것이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의병으로 나라를 지키는 데 공이 컸던 승려들에 대한 믿음도 참고가 되었다.

조선 전기에 설치된 외사고의 보존 관리는 그 지방의 수령이 책임지도록 하였다. 궁궐 안에 있는 춘추관을 제외한 외사고 중 충주 사고는 충청도 관찰사와 충주 목사의 관할 아래 수호관(守護官) 5명과 별색(別色), 호장(戶長), 기관(記官), 고직(庫直) 각 1명을 두어 전담하여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로 보아 전주 사고와 성주 사고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사고를 산중으로 옮겼지만, 사고마다 환경은 달랐다. 처음 설치된 오대산과 태백산 그리고 묘향산 사고는 산중이었고, 마니산은 강화라는 섬에 있었지만 역시 산중이었다. 그런데 마니산이 정족산으로, 묘향산이 적상산으로 바뀌면서 환경이 달라졌다. 바로 정족산성(鼎足山城)과 적상산성(赤裳山城) 안에 사고가 설치된 것이다. 즉 산중에 있는 산성 안에 사고가 설치되어 이중(二重)으로 방어가 가능하게 되었다.

[적상산 사고의 설치]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의 세력이 약화하고 후금이 강성해지면서 북방의 경비가 강화되었다. 다른 한편 묘향산 사고에 봉안된 실록의 보존이 우려되었다. 이에 적상산이 적지로 선택되고, 국방 시설인 적상산성을 점검하고 정비하는 한편 사고 설치를 위한 사전 준비가 진행되었다. 1614년(광해군 6) 실록각(實錄閣)이 건립되었고, 4년 후 1618년(광해군 10) 처음으로 『선조실록(宣祖實錄)』이 봉안되었다. 묘향산 사고에 보관 중이던 『조선왕조실록』이 적상산 사고(赤裳山史庫)로 이안된 것은 1634년(인조 12)이었다. 이처럼 16년 만에 이안된 것은 후금의 명나라 침략, 인조반정(仁祖反正), 이괄(李适)의 난(亂), 정묘호란(丁卯胡亂) 등 급박하게 돌아간 정세가 원인이었다. 묘향산 사고본 실록이 적상산 사고로 이안된 후 1641년(인조 19) 선원각(璿源閣)에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이 봉안됨으로써 조선 후기 외사고의 전형(典型)인 선사양각(璿史兩閣)을 갖추게 되었다.

적상산 사고의 규모와 시설물 그리고 수호 인원에 관한 기록은 1632년(인조 10) 작성된 『무주현 적상산성 조진 성책(茂朱縣赤裳山城條陳成冊)』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무주 현감 김수창(金壽昌)이 조정에 보고하기 위해 작성한 『무주현 적상산성 조진 성책』에는 산성의 규모와 4대문 현황, 가사형지(家舍形止), 수성 제도(守城制度), 군량(軍糧)과 군기(軍器)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무주현 적상산성 조진 성책』에 기록되어 있는 산성 수호 인력으로는 참봉(參奉) 2명, 승장(僧將) 1명, 수복(守僕) 12명[매월 2명씩 수직], 군병(軍兵) 84명[매월 7명씩 교대]이 있었고, 승도(僧徒)는 본래 상좌 이외 12명이었으나 8읍에서 1~2명씩 모아 16명으로 모두 합하여 115명이었다. 반면 ‘절목’에 기록된 사고 수호 인력은 참봉 2명, 승도 20명, 민호(民戶) 4명으로 모두 26명에 불과하다. 이를 통해 사고 수호 인력보다 산성 수호 인력이 훨씬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참봉은 2명으로 매월 한 사람씩 교대로 근무하는데, 이들은 대개 생원이나 진사나 유학으로 예조(禮曹)의 천거를 받아 파견되었다. 1645년(인조 23) 승병들의 숙소 문제로 호국사(護國寺)가 창건되었다.

적상산 사고는 해발 800m가 넘는 적상산성 내에 위치하였고, 출입문은 실록각의 위치와 정면으로 궤(軌)를 같이하여 일직선상에 두었다. 오른쪽에 실록각을, 왼쪽에 선원각을 두었는데, 그 사이에도 담이 있었다. 그리고 주위는 흙으로 쌓은 담이 둘러싸고 있었다. 사각과 선원각 모두 목조로 된 누형(樓形)의 건물로 2층 구조에 상층만 지붕을 설치하였고, 사각의 1층에는 기타 서적이, 2층에는 『조선왕조실록』과 기타 서적이, 선원각 2층에는 『선원보략(璿源譜略)』과 기타 서적이 수장(收藏)되었다. 적상산 사고는 일제 강점기에 폐지되었고, 시설물 중 선원각 건물만 변형된 채 안국사(安國寺)의 천불전(千佛殿)으로 현존하며, 1999년 사각과 선원각이 복원되었다.

[적상산 사고와 무주 행정 구역의 변화]

사고의 수호와 관리는 예조[춘추관]에서, 산성의 수호와 관리는 병조(兵曹)에서 하였으므로 양자는 전혀 별개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산성과 사고는 무주현(茂朱縣)에 있고, 일선의 책임자는 무주 현감이었다. 따라서 무주 현감이나 무주현의 입장에서는 사고와 산성을 동시에 수호하고 관리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었다.

이로 인해 경중사행(京中使行)과 관찰사를 비롯한 지방의 사행(使行)이 끊이지 않아 이들을 맞이하는 접대와 환송이 만만치 않았다. 더욱이 무주 현감이 인근 고을에서도 직급이 낮은 관계로, 분담하여 처리하게 되어 있는 산성 관리마저 도맡아 하는 등 극한 상황에 처하였다. 이에 대해 이웃 고을의 일부를 무주에 할속(割屬)시켜 부담을 덜어 주자는 논의가 여러 차례 있었으나 바로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던 1674년(현종 15) 무주현무주 도호부(茂朱都護府)로 승격되면서 현감이 도호부사 겸 수성장(都護府使兼守城將)으로 위상이 높아졌고, 인근 지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즉 무주 도호부로 승격됨은 물론 부사가 수성장(守城將)이 됨으로써 산성과 사고 수호의 부담에서 벗어난 것이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설치된 외사고는 모두 15곳[고려 7, 조선 8]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무주 지역과 같은 변화는 없었다. 적상산 사고가 설치된 이래 무주 지역의 가장 큰 변화는 오늘날 무주군을 형성하는 근간이 되었다는 점이다. 현재의 무주군은 무주읍안성면, 부남면, 적상면, 설천면, 무풍면 등 1읍, 5개 면이지만, 1414년(태종 14) 무풍현주계현(朱溪縣)이 통폐합되어 ‘무주현’이 되었을 때에는 현재의 무주읍무풍면, 그리고 적상면 등 3개 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안성면, 설천면, 부남면은 당시 모두 금산군(錦山郡)에 속하였는데, 무주현무주 도호부로 승격되면서 안성면설천면 지역이 무주현에 편입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무주군의 영역에 관한 기틀이 형성된 데에는 적상산성적상산 사고가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두 번째는 무주 지역의 지위에 관한 변화이다. 적상산 사고가 설치될 당시 무주현은 전라도에서도 변두리에 속한 깊은 산중의 작은 고을이었다. 그런데 도호부로 승격하고, 1703년(숙종 29)에는 토포사(討捕使)까지 겸임하게 되어 실질적인 독진관(獨鎭管)이 됨으로써 인근 고을을 아우르는 권위와 책임을 갖게 되었고, 인근 7읍의 중심지가 되었다.

세 번째는 전라도 관찰사나 병사(兵使) 등의 순행(巡行)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외부와의 교류가 많아졌다. 더욱이 『조선왕조실록』의 봉안과 포쇄(曝曬) 및 고출(考出) 등을 위하여 고위급의 당상관(堂上官)을 비롯하여 사관의 방문이 잦아라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중앙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들을 통하여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사행 나온 관원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였다. 실록의 봉안과 고출, 포쇄와 수개 등에는 왕명(王命)을 수행하는 관원이 어김없이 함께하였다. 이들은 서울에서 직접 내려온 관원들로 대접에 소홀할 수 없었다. 이들에게는 주연(酒宴)은 물론 볼거리로 ‘낙화 놀이’가 제공되었다. 그 당시 낙화놀이는 전국적으로 행하여졌지만, 무주 도호부 관아(官衙) 앞에 있는 남대천(南大川)에서 이루어지는 ‘낙화 놀이’는 장관이었다고 한다.

[적상산 사고 폐지 이후]

적상산 사고는 조선의 운명이 다하면서 함께 폐지되었다. 그리고 적상산 사고에 보관하고 있던 『조선왕조실록』과 『선원계보기략』을 비롯하여 각종 역사서는 일제에 의해 서울로 옮겨졌다. 그중 『조선왕조실록』은 이왕직 도서관에 이관되어 일제 강점기 내내 보관되었는데, 6·25 전쟁 초기 부산으로 이안된 후 소실되었다고 전해졌다. 그러던 1990년대 북한에서 국역본(國譯本) 『리조실록』이 출판되었다. 그리고 1990년대 후반 한국 방송 공사는 적상산 사고본 실록이 평양의 김일성 종합 대학 도서관에 보관 중인 것으로 보도하였다. 6·25 전쟁 초기 김일성(金日成) 주석의 특별 명령에 따라 북한으로 반출되었던 것이다. 적상산 사고는 본래 적상산 정상부를 이용해 설치된 무주 양수 발전소의 담수호(湛水湖)에 잠겼기에, 복원된 적상산 사고는 그 위쪽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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