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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재와 근심 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501186
한자 道馬-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덕지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영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0년 - 「도마재와 근심 터」, 『무주 군지』에 수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2년 - 「도마재와 근심 터」, 『내 고장 전설집』에 수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2004년 - 「도마재와 근심 터」, 『무주 군지』 중권에 수록
관련 지명 도마재 -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덕지리 지도보기
성격 설화|지명 유래 전설
주요 등장 인물 정희량|정희량의 누이|반군
모티프 유형 이인좌의 난

[정의]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덕지리에서 도마재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도마재와 근심 터」는 1728년(영조 4)에 일어난 이인좌(李麟佐)[?~1728]의 난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무주 지역의 도마재라는 장소와 공간에 결합되어 전승되고 있는 지명 유래 전설이다.

[채록/수집 상황]

「도마재와 근심 터」는 1990년 무주군에서 편찬한 『무주 군지』에, 1992년 김경석이 편찬하고 무주군에서 발행한 『내 고장 전설집』에, 2004년 무주 군지 편찬 위원회에서 간행한 『무주 군지』 중권 등에 각각 수록되어 있다. 정확한 채록 시기는 미상이다.

[내용]

신임사화[1721~1722] 이후 물러났던 노론이 영조 즉위로 재집권하였다. 그러자 이인좌, 정희량, 김영해 등이 벼슬에서 밀려난 소론 일파의 호응을 얻어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을 추대, 왕통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의 주모자인 정희량은 안음 사람이었는데 안음에서 군량을 확보하고 거창에 침입하여 군세를 크게 떨쳐 함양을 거쳐 전라도로 침입하였다.

정희량이 이끄는 반군이 지금의 무주군 무풍면 덕지리 도마재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정희량이 탄 말이 걷지도 못하고 주저앉았다. 정희량은 무리한 행군과 싸움으로 말과 군사들이 지친 것이라고 생각하고 쉬어 가도록 했다. 그런데 잠시 쉬고 있던 곳을 물으니 ‘소사’라는 것이었다. 정희량이 반란을 일으키기 전, 상궁으로 있던 그의 누이가 성문 밖 ‘소사’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기별을 하면 성 안으로 입성하도록 하였기에 정희량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 지역의 작은 마을 소사가 누이와 약속한 ‘소사’라고 생각하였다. 정희량은 며칠 동안 누님의 소식을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고, 알고 보니 한양 가까운 경기도 소사가 아니라 전라도 땅 도마재였던 것이다.

이를 깨닫고는 곧바로 진격하고자 했지만 이미 병사들은 사기가 저하되어 도무지 출격하려 하지 않았고, 이탈자들도 생겼다. 결국 관군들에 의해 반란군은 진압되었다. 정희량이 안음, 거창 등에서는 기세가 등등했으나 도마재 수호신의 도움을 받지 못해 참수당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도마재에는 지금까지도 비가 오는 밤이면 말발굽 소리와 병사들의 함성, 외로운 넋의 신음 소리가 들린다고 하며, 사람들은 정희량의 반군들이 근심하던 고개라 하여 도마재근심재라고 부른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도마재와 근심 터」의 주요 모티프는 ‘이인좌 난’이다. 「도마재와 근심 터」이인좌의 난정희량(鄭希亮)[?~1728]이 이끄는 반군을 진압할 수 있었던 것이 사실은 무주군 무풍면 덕지리 소사 마을이라는 지역 산천 덕분임을 강조하고 있다. 반군을 평정하는 데 지역 산천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지역민의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자부심과 별도로 「도마재와 근심 터」에서 무주군 무풍면 덕지리 도마재를 ‘근심재’로 부르는 것을 보면, 반군에 대한 지역민의 측은지심도 동시에 내포되어 있는 설화임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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