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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500690
한자 河大鎬
영어공식명칭 Ha Daeho
이칭/별칭 천휴(天休)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이동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19년연표보기 - 하대호 출생
몰년 시기/일시 1870년연표보기 - 하대호 사망
출생지 무주 도호부 -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 지도보기
활동지 무주 도호부 -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
성격 유생|의인
성별

[정의]

개항기 무주 출신의 유생이자 의인.

[가계]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천휴(天休). 아버지는 양사재를 세우고 교화를 펼친 하재황이며, 아들은 무주 향교 대성전(茂朱鄕校大成殿)을 보수하고 후학을 양성한 하태호이다.

[활동 사항]

하대호(河大鎬)[1819~1870]는 지금의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편 현내리에서 출생하였다. 1866년(고종 3) 8월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공하여 일으킨 병인양요(丙寅洋擾)로 나라가 혼란해지자, 지방의 유림장(儒林長)으로서 전주 전라 감영(全羅監營)으로 가서 태인의 유력자이자 유생 김종만(金鍾萬)과 의논하여 흥의소(興義所)를 창설하고, 각 군(郡)의 유림(儒林)들에게 격문을 발송하여 의병의 궐기를 촉구하였다. 그리하여 큰 규모의 의병대를 조직하였으나 프랑스의 함대가 격퇴되었다는 소식에 향리로 돌아왔다. 흉년이 들어 사창미(社倉米)를 납부하기 어려워지자 백성들로부터 사창미를 기두지 않았다. 현장 조사를 나온 무주 도호부사가 이를 문제삼고 하대호를 볏더미 위에 앉히고 화형에 처하려고 하자 백성들이 간청하여 용서를 받았으며, 다음 해 백성들이 미납분을 다 바쳤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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