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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500684
한자 崔北
영어공식명칭 Choe Buk
이칭/별칭 식(埴),성기(聖器),유용(有用),성재(星齋),기암(箕庵),거기재(居其齋),삼기재(三奇齋),호생관(毫生館),좌은(坐隱),반월(半月),기옹(奇翁),최산수(崔山水),칠칠(七七)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전라북도 무주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12년연표보기 - 최북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48년 - 최북 조선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옴
몰년 시기/일시 1786년[추정] - 최북 사망
성격 화가
성별
본관 경주|무주

[정의]

조선 후기 무주 출신의 화가.

[개설]

가계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이가환(李家煥)[1742~1801]은 본관을 경주라고 하였다. 한편, 조병유(趙秉瑜)의 『적성지』, 장지연(張志淵)[1864~1921]의 『진휘속고(震彙續考)』·『일사유사(逸士遺事)』, 오세창(吳世昌)[1864~1953]의 『근역서화징』 등에는 무주 최씨로 나온다. 그런데 무주 최씨는 주계 최씨로도 불렸으며, 주계 최씨는 경주 최씨에서 분적하였으므로, 넓게 보면 경주 최씨, 좁게 보면 무주 최씨로 볼 수도 있다.

초명은 최식(埴), 자는 성기(聖器)·유용(有用), 호는 성재(星齋)·칠칠(七七)·기암(箕庵)·거기재(居其齋)·삼기재(三奇齋)·호생관(毫生館)·좌은(坐隱)·반월(半月)·기옹(奇翁)이다. 이중 호생관이 가장 많고 칠칠, 거기재, 삼기재 등의 순서로 사용하였다. 뒤에 최북(崔北)으로 개명하였다. 아버지는 계사(計士)를 지낸 최상여(崔尙餘)이다.

[활동 사항]

최북(崔北)[1712~1786?]은 1712년에 태어나 영조 때 활동한 화가이다. 최북의 생년에 대해서 1712년으로 보는 설, 1720년과 1738년으로 보는 설 등이 있다. 이가환은 『동패낙송(東稗洛誦)』에서 숙종 임진생[1712년]이라고 하였다. 몰년에 대해서도 49세로 보는 설과 60세를 넘겼다는 설 등이 있다. 49세에 죽었다는 설은 조희룡(趙熙龍)[1789~1866]의 『호산외사(壺山外史)』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신광하(申光河)최북의 죽음을 애도한 조시 「최북가(崔北歌)」를 1786년에 썼고, 최북의 작품인 「송음관폭도(松蔭觀瀑圖)」가 1765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아, 최북은 1712년부터 1786년경까지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최북은 1748년(영조 24) 조선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화원이 아니었으므로 화원 자격으로 간 것은 아니고 정사(正使)나 부사(副使), 종사관(從事官)의 개인 수행원으로 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성호 이익(李瀷)[1681~1763]의 「최칠칠의 일본행에 부친 시[送崔七七之日本三首]」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산수화(山水畵)에 뛰어나 최산수(崔山水)라고도 불리었으며, 한 눈이 멀어서 항상 반안경(半眼鏡)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성질이 괴상하여 미친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었으며, 술을 즐겨 하루에 보통 5되~6되나 마셨다고 한다. 그림을 팔아 가며 전국을 주유(周遊)하다가 금강산 구룡연(九龍淵)에서 천하의 명인이 천하의 명산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외치며 몸을 던졌으나 미수에 그친 일도 있었다. 최북은 시(詩)에도 뛰어났다.

[저술 및 작품]

작품으로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추경산수도(秋景山水圖)」, 「월하산수도(月夜山水圖)」, 「미법산수도(米法山水圖)」, 「매하쌍치도(梅下雙雉圖)」, 「표훈사도(表訓寺圖)」, 「산거도(山居圖)」, 「단구승유도(丹丘勝遊圖)」, 「송음관폭도」, 「한강조어도(漢江釣魚圖)」[국립 광주 박물관 소장], 「조어도(釣魚圖)」[개인 소장], 「풍설야귀도(風雪夜歸圖)」, 「공산무인도(空山無人圖)」, 「누각산수도(樓閣山水圖)」 등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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