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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500676
한자 張弼武
영어공식명칭 Jang Pilmu
이칭/별칭 무부(武夫),백야(栢冶),양정(襄貞)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평장길 79[죽천리 1716-3]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동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10년연표보기 - 장필무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43년 - 장필무 무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59년 - 장필무 양산 군수 부임
활동 시기/일시 1572년 - 장필무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오랑캐 침입을 막음
활동 시기/일시 1573년 - 장필무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임명
몰년 시기/일시 1574년연표보기 - 장필무 사망
출생지 영동현 - 충청북도 영동군
묘소|단소 장필무 묘소 - 충청북도 영동군 양강면 교동길 46[괴목리 산72]
사당|배향지 죽계 서원 -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평장길 79[죽천리 1716-3]지도보기
사당|배향지 화암 서원 -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당곡리
성격 무신
성별
본관 구례
대표 관직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정의]

전라북도 무주 죽계 서원에 배향된 조선 전기 무신.

[가계]

본관은 구례(求禮). 자는 무부(武夫), 호는 백야(栢冶). 할아버지는 군수 장사종(張嗣宗)이며, 아버지는 장근(張謹)이다. 어머니는 심씨(沈氏)로 1510년(중종 5) 태어났다. 충청북도 영동군 출신으로 아들은 장의현(張義賢), 장지현(張知賢)이다. 장의현이 무주 지역에 들어와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장지현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순절하였다.

[활동 사항]

장필무(張弼武)[1510~1574]는 태어날 때부터 몸집이 컸다고 전한다. 1543년(중종 38)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사헌부 감찰로 있다가 명천 현감에 임용되었다. 치적이 뛰어나 온성 판관으로 이배되었다가 재상(災傷)을 잘못 파악하였다고 하여 파직되었다. 고향인 영동 집으로 돌아와 선영 옆에 초가집을 짓고 살았다. 1559년(명종 14) 양산 군수로 임명되었으며, 그 뒤 부산진 첨절제사, 제주 목사, 만포진 첨절제사를 지냈다. 종사관(從事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온성 판관으로 변방의 경계를 엄중히 하였다. 1572년(선조 5)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오랑캐의 침입을 막았고, 1573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명종(明宗)·선조(宣祖) 대의 무인으로서는 가장 청렴결백하다고 이름이 났으며, 역학(易學)에 밝았다고 전한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 『백야 유사(栢冶遺事)』가 있다.

[묘소]

묘는 충청북도 영동군 양강면 교동길 46[괴목리 산72]의 반평산(半平山)에 있다. 묘소 앞에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가 지은 묘갈명이 있다.

[상훈과 추모]

세상을 떠난 뒤 청백리로 뽑혔으며,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양정(襄貞)이다. 아들 장의현, 장지현과 함께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죽천리에 있는 죽계 서원과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당곡리의 화암 서원(花巖書院)에 배향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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