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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500416
한자 張智賢忠臣閣
영어공식명칭 Jangjihyeon Chungsingak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괴목리 472-4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범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축|증축 시기/일시 1866년 - 장지현 충신각 중수
현 소재지 장지현 충신각 -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괴목리 472-4 지도보기
성격 정려각
양식 홑처마 맞배지붕
정면 칸수 1칸
측면 칸수 1칸
소유자 구례 장씨 문중
관리자 구례 장씨 문중

[정의]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괴목리에 있는 조선 후기 장지현의 충신각.

[개설]

장지현(張智賢)[1536~1593]의 자는 명숙(明叔), 호는 삼괴당(三槐堂)이며, 본관은 구례(求禮)이다. 고려 문하시중(門下侍中) 봉성 부원군(鳳城府院君) 악(岳)의 후손으로, 임진왜란 때 왜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한 의병장이다. 장지현은 병마절도사 필무(弼武)의 둘째 아들로 충청도 영동군 매천에서 태어났다. 1590년(선조 23) 지략(智略)으로 천거를 받아 전라도 병마절도사 신립(申砬)의 부장(部將)이 되어 변방 오랑캐를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웠고, 이듬해 사헌부 감찰(監察)에 올랐으나, 사직하고 무주 당산리 향리로 돌아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2,000여 명을 이끌고 출전하였으며 경상도 관찰사 윤선각(尹先覺)에 의하여 용맹을 인정받아 비장(裨將)으로 발탁되었다. 이듬해 부하 수천 명을 거느리고 황간(黃澗)의 추풍령 북방 오룡동에 배수진을 치고 관군과 합세하여 적의 진로를 차단하는 데 전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금산 방면에서 공격해 온 왜장 구로다[黑田長政] 군사의 협공을 받아 일진(一陣)이 모두 패하였다. 이에 장지현이 홀로 몸을 떨쳐 일어나 많은 적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화살이 다 떨어지고 활마저 부러졌고, 엄지손가락까지 살이 벗겨져 칼로 적을 베려 하였다. 그렇지만 칼 또한 부러져 끝내 사촌 동생 호현(好賢)과 함께 전사하였다. 장지현의 공을 기려서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 참의에 추증하였고,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화암 서원과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죽계 서원에 배향하였다.

[위치]

무주군 적상면 포내리 무주 전력 홍보관에서 무주호를 끼고 지방도 제727호선 괴목로를 따라 4㎞ 이동하면 괴목리 원괴목 마을이 나온다. 원괴목 마을 입구에서 500m 정도 걸으면 뒷산에 장지현 충신각(張智賢忠臣閣)이 있다. 장지현의 무덤은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사천리 적상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 신대 마을[서창]에 있다.

[변천]

1664년(현종 5)에 명정(命旌)되었고 1679년(숙종 5)에 정려(旌閭)되어 장지현이 살던 무주군 무주읍 당산리에 홍문을 세웠다. 이후 자손들이 무주군 적상면 괴목리에 여각(閭閣)을 세웠다. 1866년(고종 3)에 중수하였다.

[형태]

정면 1칸[190㎝], 측면 1칸[180㎝]의 홑처마 맞배지붕의 충신각 안에 충신 현판이 있다. 충신 현판 내용은 ‘충신 증통정대부 병조 참의 봉정대부 행사헌부 감찰 장지현지문 숭정 기원후 갑진 윤사월 십구일 명정(忠臣贈通政大夫兵曹參議奉正大夫行司憲府監察張智賢之門崇禎紀元後甲辰閏四月十九日命旌)’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황]

장지현 충신각은 원괴목 마을 뒷산에 충신각 대문과 충신각으로 이뤄져서 보존되고 있다. 구례 장씨(求禮張氏) 문중이 관리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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