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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천동 공비소탕작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500361
한자 九千洞共匪掃蕩作戰
영어공식명칭 Gucheondong a Mopping-up Operation Communist Guerrillas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무주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임혜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9월연표보기 - 구천동 공비소탕작전 개시
종결 시기/일시 1955년연표보기 - 구천동 공비소탕작전 종료
성격 공비 토벌 작전
관련 인물/단체 공산 투쟁단|무장 특공대|학도 전투대

[정의]

6·25 전쟁 후 월북하지 못하고 빨치산으로 남아 있던 무주 지역의 공비들을 토벌하기 위한 작전.

[역사적 배경]

1950년 7월 24일 새벽 공산군이 무주읍 내에 들어왔다가 9월 26일 철수하였다. 그러나 월북하지 못하고 남아 있던 공비들이 무주 주변의 산간 지역으로 들어가서 경찰서 파견대 등 후방을 공격하는 일이 있었다.

[경과]

1950년 9월 공산군이 철수한 이후 무주 지역 청년들은 공산 투쟁단, 무장 특공대, 학도 전투대 등을 자체적으로 조직하고 군, 경과 함께 공비 토벌에 참여하였다. 특히 1951년 덕유산 공비 이현상(李鉉相) 부대가 무주군 무풍면 은산리에 있던 경찰 파견대를 급습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자 덕유산의 공비소탕작전을 위해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1사단[화랑 부대]은 본격적인 공비 토벌 작전에 들어갔다. 공비들의 은신처를 없애기 위해 불가피하게 산속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소개하는 작전을 펼치게 되었다. 은신처를 잃은 공비들은 겨울 동안 이동하였다가 다음 해 봄이 되자 녹음이 우거진 덕유산으로 모여들었고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작전이 벌어졌다.

[결과]

1953년 5월에는 구천 국민학교[구천 초등학교]를 개학할 수 있을 만큼 안정되었다. 특히 9월 중순 덕유산에 숨어 있던 남로당 빨치산의 제2병단 사령관 이현상이 사살됨으로써 그 세력은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1955년 전투 경찰대 해체됨으로써 사실상 구천동 공비 소탕 작전은 종료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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