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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500237
한자 古地圖
영어공식명칭 Old Map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무주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진성

[정의]

조선 시대에 제작된 전라북도 무주 지역의 옛 지도.

[개설]

조선 시대에 무주부 또는 무주군을 그려 놓은 지도들을 고지도라고 하며, 그림식 또는 회화식(繪畵式) 지도가 대부분이며, 이외에 목판본(木版本) 지도들도 포함되어 있다. 무주부를 그린 고지도들은 무주 읍치를 중심으로 행정 경관[동헌, 내아, 객사, 아사, 창고 및 옥 등을 포함], 제사 경관[향교, 사직단, 성황단, 여단], 자연 경관[산천, 고개, 험애], 인문 경관[마을, 누정, 봉수, 역원, 산성, 거리, 방위, 진보 등을 포함] 등을 표현하고 있어 조선 시대의 생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종류]

조선 시대 후기에 무주부를 그린 고지도들은 회화식, 방안식(方眼式), 목판본(木版本) 등으로 구분된다. 회화식 지도로는 『광여도(廣輿圖)』, 『해동 지도(海東地圖)』, 『1872년 군현 지도(郡縣地圖)』, 『여지도(輿地圖)』, 『지승(地乘)』 등이 있다. 방안식 지도로는 『비변사인 방안 지도(備邊司方眼地圖)』, 『동여도(東輿圖)』, 『청구도(靑邱圖)』, 『청구 요람(靑邱要覽)』 등이 있으며, 목판본으로는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가 대표적이다. 이외에 무주 읍지인 『적성지(赤城誌)』에 수록된 「무주 관부도(茂州官府圖)」와 「무주 관부 폭원 총도(茂朱官府幅員總圖)」 등이 있다.

[유형별 분류]

고지도는 수록된 지역의 규모에 따라 전국 지도, 지방 지도, 군현 지도, 관방 지도로 분류할 수 있다. 전국 지도에 비하여 군현 지도는 조선 시대 행정 구역의 기본 단위였던 부(府), 목(牧), 군(郡), 현(縣)의 생활 공간을 다루고 있다.

무주부를 그린 군현 지도는 형태에 따라 ‘책자로 된 지도’, ‘낱장으로 된 지도’, ‘지리지에 포함된 부도’ 등으로 구분된다. 책자로 된 군현 지도로는 『해동 지도』, 『여지도』, 『지승』, 『광여도』, 『팔도 지도』 등이 대표적이며, 낱장으로 된 지도에는 『1872년 군현 지도』가 대표적이다. 지리지에 포함된 부도에는 『여지도서(輿地圖書)』의 「무주부 지도」, 『호남 읍지』에 수록된 「무주부 지도」, 『적성지』의 「무주 관부도」와 「무주 관부 폭원 총도」 등이 있다.

1. 군현 지도책

지도 형태상 지도첩은 책으로 묶여진 경우로 분첩식도 있다. 이들의 편찬 연도 파악은 어려우나 대부분 18세기 이후에 편찬되어 현재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대부분 채색 필사본으로 『해동 지도』[18세기 중엽, 8책, 47×31㎝], 『여지도』[1736~1776년, 6책, 27×19㎝], 『지승』[19세기 초엽, 6책, 27×19㎝], 『광여도』[19세기 초, 7책, 27×17㎝], 『팔도 지도』[1785~1800년, 8책, 35×21㎝] 등이 대표적이다. 이 가운데 『여지도』는 2책에 전라도 전도와 53개의 고을 지도 및 제주의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무주를 그린 지도 역시 산천과 고을 등을 자세하게 수록하고 있으며, 특히 지명의 경우는 다른 지도들과 비교 가능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2. 낱장 군현 지도

『1872년 군현 지도』가 대표적이다. 채색 필사본으로 중앙에서 전국의 군사 시설 및 지역의 실태를 파악할 목적으로 1871년 전국의 군현에서 읍지가 편찬되고 1872년에 지도가 제작되었다. 자연 경관 및 인문 경관 등이 잘 수록되어 있어 조선 후기 지역 사회의 이해와 복원을 위한 자료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지도를 그리던 사람과 관점 및 방식이 모두 달라서 구성과 내용의 정도가 지역마다 큰 차이가 있다. 무주부의 경우에는 무주 읍치를 중심으로 행정 경관, 제사 경관, 자연 경관, 인문 경관 등이 잘 그려져 있다. 이외에도 적산산성의 군사 시설과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관하던 사고(史庫)와 산성(山城)도 표시되어 있다.

3. 지리지 중 부도

『여지도서』[1757~1765]에 수록된 「무주부 지도」, 『호남 읍지』[1895]에 수록된 「무주부 지도」, 『적성지』[1896~1898]의 앞에 수록된 「무주 관부도」와 「무주 관부 폭원 총도」 등이 대표적이다. 이 가운데 『여지도서』의 「무주부 지도」는 무주 읍치와 적산산성을 중심으로 자세하게 그려져 있어 『1872년 군현 지도』와 수록된 내용을 비교할 수 있는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적성지』에 수록된 「무주 관부도」는 무주 읍치를 중심으로 관아 건물이 밀집된 읍치를 확대해서 표현함으로써 읍치의 구조와 관아의 배치까지 알 수 있게 그렸다. 「무주 관부 폭원 총도」는 읍치와 다른 지역의 축척을 거의 비슷하게 하였기 때문에 자세하지는 않아서 읍치에는 관아 건물을 명칭 없이 여러 개 그려 넣었을 뿐이고. 다른 고지도에서 중요시한 적산산성은 단지 가옥 2채만으로 그려 넣었다.

4. 대축척 지도의 부분도

『대동여지도』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청구도』『동여도』의 내용에 입각해서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1861년(철종 12)에 만든 전국 지도로 일반에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목판본으로 찍어서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으며, 남북이 22층이고 각각의 층을 접으면 책자가 된다. 지도의 실제 크기는 세로 약 7m, 가로 약 3m로 『청구도』와 마찬가지로 1:160,000의 대축척 지도이다. 목판본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중요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지명은 삭제하였다. 무주부의 경우, 도로는 실선으로 나타냈으며, 그 위에 약 4㎞[10리]마다 점을 찍어 절대 거리를 알 수 있게 하였다. 지역 전체의 축척을 동일하게 적용했기 때문에 읍치는 위치만 표시되어 있고, 관아 시설이나 향교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도로는 읍치를 결절점으로 해서 남북 도로와 동서 도로가 표시되어 있다. 이 밖에 적상산 사고도 표시되어 있다.

[무주부를 그린 고지도의 의의 및 평가]

무주를 그린 군현 지도들은 모두 무주 읍치와 적상산성을 함께 다루고 있는데, 무주 읍치보다는 적상산성의 비중을 더 크게 두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임진왜란 이후부터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가 위치한다는 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 지도들은 북으로는 옥천계, 남으로는 장수계, 동으로는 지례계 및 거창계와 안음계, 서로는 금산계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들 모두 채색 지도라서 면들과 소속 리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서로 다른 색을 이용하였으며, 『여지도』「전라도 무주부」처럼 소속 면(面)들을 노란색 바탕에 빨간색 사각형으로 채색하여 강조하는 경우도 있다. 이외에도 행정 경관[동헌, 내아, 객사, 아사, 창고 및 옥 등을 포함], 제사 경관[향교, 사직단, 성황단, 여단], 자연 경관[산천, 고개, 험애], 인문 경관[마을, 누정, 봉수, 역원, 산성, 거리, 방위, 진보 등을 포함] 등을 그려 넣는 등, 당시로서는 중요한 지리 정보들을 모두 표현하고 있어 경관의 복원이나 재현에 중요한 지표로 이용된다. 이러한 주요 경관들의 공간적 배치에는 풍수지리(風水地理) 사상과 『주례 고공기(周禮考工記)』에서 강조된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리가 동시에 반영되어 있다. 즉 행정 경관은 주변의 자연 경관에 의해 에워싸여 있는 명당에 입지하고 있으며, 제사 경관은 관아를 중심으로 하는 행정 경관과는 떨어져 있되 읍치의 행정적 경계에서는 최대한 벗어나지 않고 주변의 산지와 언덕 등에 입지함으로써 읍치 경관의 주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외에도 무주를 그린 회화식 채색 지도의 부기(附記)마다 대부분 건치 연혁(建治沿革), 관방(關防), 험애(險애)를 비롯하여 동서남북의 경계와 거리를 표시하고 있다. 특히, 한양과의 거리와 방위, 전주 감영과의 거리 및 바닷가 병영과의 절대 거리를 기록함으로써 유사시를 대비한 군사적 목적의 용도에도 많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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