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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악바위와 남선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501178
한자 -南仙窟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전라북도 무주군 부남면 대유리
집필자 김영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0년 - 「감악바위와 남선굴」, 『무주 군지』에 수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2년 - 「감악바위와 남선굴」, 『내 고장 전설집』에 수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2004년 - 「감악바위와 남선굴」, 『무주 군지』 중권에 수록
관련 지명 감악바위 - 전라북도 무주군 부남면 대유리 대티 마을
관련 지명 남선굴 - 전라북도 무주군 부남면 대유리 대티 마을
성격 설화|인물 전설|동굴 전설
주요 등장 인물 이성계|남선
모티프 유형 충절

[정의]

전라북도 무주군 부남면 대유리 대티 마을에서 감악[가막] 바위남선굴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감악바위와 남선굴」은 고려 충신인 남선(南仙)이라는 인물과 무주군 부남면에 있는 ‘감악바위 굴’이라는 산천이 결합하여 ‘남선굴’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는 동굴 유래 전설이다.

[채록/수집 상황]

1990년 무주군에서 편찬한 『무주 군지』에, 1992년 김경석이 편찬하고 무주군에서 발행한 『내 고장 전설집』에, 2004년 무주 군지 편찬 위원회에서 간행한 『무주 군지』 중권 등에 「감악바위와 남선굴」이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어 있다. 정확한 채록 시기는 미상이다.

[내용]

고려 말의 충신인 남선은 학문과 지혜가 뛰어나고 충절이 굳으며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성품의 인물이었다. 그런데 고려 왕조가 붕괴되고 조선이 건국되자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며 절개를 지키기 위해 모든 관직을 버리고 무주군 부남면 대유리 대티 마을감악[가막] 바위 밑에 굴을 파고 은둔 생활을 하게 되었다. 태조 이성계남선의 충절을 높이 사서 그를 한양으로 불러오려고 했으나 끝내 거절하고 굴속에서 살다 죽었다. 남선이성계의 회유에 견디다 못해 감악바위에서 투신했다고 하기도 하고, 굴에서 단식해서 죽었다는 설도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은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감악바위 위에 절개를 지킨 선비라는 의미의 ‘수절사(守節士)’라는 글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그리고 남선이 기거했다는 감악바위 밑의 굴을 ‘남선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모티프 분석]

「감악바위와 남선굴」의 주요 모티프는 ‘충절’이다. 충절이 지역 산천과 결합하면서 충절의 의미는 단순히 사전적 의미에 그치지 않고 무주 지역 전체로 확산되는 효과를 가져온다. 즉, 충절을 상징하는 인물이 무주군 부남면 대유리 대티 마을감악바위 밑 굴에 와서 생을 마쳤다는 이야기를 통해 대티 마을은 충절의 고장으로서의 상징성을 얻게 되는 효과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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