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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500699
한자 柳景堤
영어공식명칭 Yu Gyeongje
이칭/별칭 화중(和中)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효자·열녀
지역 전라북도 무주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송만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02년연표보기 - 유경제 출생
몰년 시기/일시 1856년연표보기 - 유경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88년 - 유경제 조봉대부 동몽교관에 증직
사당|배향지 당산리 유경제 효자각 -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당산리 지도보기
성격 효자
성별
본관 문화(文化)

[정의]

조선 후기 무주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화중(和中)이다.

[활동 사항]

유경제(柳景堤)[1802~1856]는 열세 살이 되던 해에 친부모의 품을 떠나 작은아버지의 양자(養子)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양가(養家)의 부모를 모시는 데 있어서나 친가(親家)의 부모를 모시는 데 있어서나 언제나 지극정성을 다하였다. 특히 양아버지가 노환(老患)으로 위급한 지경에 이르자, 유경제는 자신의 왼쪽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어 목숨을 며칠 더 연장시켰다. 또한 생부(生父)가 위급한 지경에 이르자, 이번에는 자신의 오른쪽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어 생부의 목숨도 역시 며칠을 더 연장시켰다. 유경제의 이러한 효심은 무주와 전라도에 거주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유경제는 1856년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유경제가 사망한 후에 많은 사람들이 유경제의 지극한 효심을 기리기 위하여 증직(贈職)과 효자비를 내려주어야 한다고 청하였다. 이에 1888년(고종 25) 유경제에게 조봉대부 동몽교관(朝奉大夫童蒙敎官)이라는 증직과 함께 효자비를 세워도 좋다는 허가가 내려졌다. 한편 당산리 유경제 효자각(堂山里柳景堤孝子閣)은 현재 무주군 무주읍 당산리 원당산(元堂山) 마을에 있는데, 이 효자각에는 유경제 외에도 유경제와 혈연적으로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정려비(旌閭碑)와 효자비도 같이 있는 상태이다. 효자비의 주인공은 유인성(柳寅誠)이며, 정려비의 주인공은 유풍렬(柳豊烈)의 처(妻) 창녕 성씨(昌寧成氏)이다. 유풍렬은 유경제의 아들이고, 유인성은 유풍렬의 아들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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