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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500689
한자 崔鳳來
영어공식명칭 Choe Bongrae
이칭/별칭 성서(聖瑞),채포(蔡圃)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무주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동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거주|이주지 무주 도호부 - 전라북도 무주군
활동지 무주 도호부 - 전라북도 무주군
성격 유학자
성별

[정의]

조선 후기 무주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킨 유학자.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서(聖瑞), 호는 채포(蔡圃). 죽헌(竹軒) 최활(崔活)의 6세손이다.

[활동 사항]

최봉래(崔鳳來)는 어려서부터 몸집이 좋은 거인(巨人)이었다. “살아서 세상에 유익함이 없고, 죽어서 후세에 남김이 없으면 누가 대장부라 하랴.” 하면서 경사(經史)를 두루 탐구하고 무예를 열심히 닦았다. 1728년(영조 4) 영남에서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부응하여 정희량(鄭希亮)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무주 부사 조유수(趙裕壽)적상산성(赤裳山城)을 수호하러 들어가 본군을 지킬 장수가 없게 되자 선비 이만번(李晩蕃)과 함께 창의(倡義)하였다. 이에 무주 부사 조유수이만번을 천부장(千部將), 최봉래를 중군장(中軍將)으로 삼고 “적상산성의 선원각과 사각은 친변을 거느리고 내가 맡을 테이니 그대들은 내 대신 본부의 관을 거느리고 성초령(省草嶺)으로 가서 지키라.”고 하였다. 최봉래이만번과 함께 의병과 관군을 거느리고 성초령으로 나아가 진을 치고 의병을 여러 곳에다 설치하여 적들이 넘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마침내 적들이 기세가 꺾이어 도망가고 말았는데, 이를 조정에서 듣지 못하여 포상에는 빠지니 뜻있는 자들이 지금까지 한탄하는 이유이다. 반면 이만번고종(高宗) 때 병조 참의로 증직되고 정려가 내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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