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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500660
한자 宋秉璿
영어공식명칭 Song Byeongseon
이칭/별칭 화옥(華玉),연재(淵齋),동방일사(東方一士),문충(文忠)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두길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유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36년 8월 24일연표보기 - 송병선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77년 - 송병선 경연관 임명
활동 시기/일시 1877년 - 송병선 서연관 임명
활동 시기/일시 1877년 - 송병선 시강원 자의 임명
활동 시기/일시 1882년 1월 - 송병선 공조 참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884년 5월 - 송병선 대사헌 임명
활동 시기/일시 1884년 6월 - 송병선 대사헌 사직서 올림
활동 시기/일시 1885년 - 송병선 무주 낙향
활동 시기/일시 1885년 3월 - 송병선 이조 참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885년 8월 - 송병선 대사헌 임명
활동 시기/일시 1886년 5월 - 송병선 사교를 금할 것을 청하는 소 올림
활동 시기/일시 1905년 11월 - 송병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2차에 걸쳐 반대하는 상소 올림
활동 시기/일시 1905년 12월 - 송병선 고종에게 10조 시무책 건의
몰년 시기/일시 1905년 12월 30일[음력] - 송병선 자결
추모 시기/일시 1906년 1월 - 송병선 영의정 증직
추모 시기/일시 1906년 1월 - 송병선 문충 추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6년 2월 - 송병선 금산 성곡에 장사 지냄
추모 시기/일시 1914년 - 송병선 영동 문충사 배향
추모 시기/일시 1962년연표보기 - 송병선 대한민국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0년 - 문충사에서 용동 서원으로 개칭
출생지 회덕현 - 대전광역시 대덕구 회덕동
거주|이주지 무주 도호부 -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두길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남원부 -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두길리
거주|이주지 전주부 -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두길리
수학|강학지 서벽정 -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두길리 지도보기
묘소|단소 송병선 묘소 -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술산리 383-1
사당|배향지 용동 서원 - 대전광역시 동구 동부로73번길 44[용운동 356-1]
성격 유학자
성별
본관 은진
대표 관직|경력 대사헌

[정의]

개항기 무주 지역에서 은거하다 순국한 유학자.

[개설]

송병선(宋秉璿)[1836~1905]은 회덕(懷德) 출신으로 여러 차례 관직에 기용되었으나 모두 거절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여러 차례 정부에 시무책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1885년(고종 22) 무주로 낙향하여 서벽정(棲碧亭)을 짓고 은둔하면서 영남·호남의 선비들과 시국을 논하고 후진을 양성하면서 도학을 강론하는 데 전념하였다.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박탈되자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 등을 강력히 건의하고 나서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가계]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화옥(華玉), 호는 연재(淵齋)·동방일사(東方一士).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으로, 아버지는 송면수(宋勉洙)이다. 큰아버지는 참의 송달수(宋達洙)이고, 작은아버지는 송근수(宋近洙)이다. 동생은 송병순(宋秉珣)이다.

[활동 사항]

송병선은 1877년(고종 14) 태릉 참봉에 제수된 것을 비롯하여 경연관(經筵官), 서연관(書筵官), 시강원 자의(侍講院諮議), 사헌부 대사헌 등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880년 철종(哲宗)철인 왕후(哲仁王后)가 죽자 왕대비와 대왕대비가 소공 시마복(小功緦麻服)을 입는 것이 마땅하다는 소를 올렸다. 1881년(고종 18) 신사 봉사(辛巳封事)를 올려 시무책을 건의한 데 이어 1884년 의제 변개(衣制變改)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학문에만 전념하다 1885년 무주로 낙향하였다. 이후 현 무주군 설천면 두길리 수성대 산속 물가에 서벽정(棲碧亭)을 짓고 은둔하면서 도학을 강론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로 인하여 조선 말 무주 지방에는 그의 학풍이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박탈되자 두 차례에 걸쳐 「청토흉적소(請討凶賊疏)」를 올렸다. 송병선은 이에 대한 비답(批答)이 없자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십조 봉사(十條封事)’를 올려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 등을 강력히 건의하였다. 1905년 12월 국권이 강탈당한 것을 통분해 하면서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유서를 남겨 놓고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송병선은 유서에서 을사오적을 처형하고, 을사조약을 파기하는 한편 모두가 의(義)로써 궐기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였다.

[학문과 저술]

송병선은 동생 송병순과 함께 큰아버지 송달수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송달수가 죽은 뒤에는 작은아버지 송근수와 외삼촌 이세연(李世淵)의 지도를 받았다. 조광조(趙光祖), 이황(李滉), 이이(李珥), 김장생(金長生), 송시열 등 대유학자의 문집에서 좋은 글귀를 뽑아 『근사록(近思錄)』과 같은 범례를 좇아 책을 지어 『근사 속록(近思續錄)』이라고 하였다. 그밖의 저서로 『연재집(淵齋集)』과 『패동 연원록(浿東淵源錄)』, 『무계 만집(武溪謾集)』, 『동감 강목(東鑑綱目)』 등이 있다.

[묘소]

묘는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술산리 383-1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송병선이 순국하자 고종이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914년 왕명으로 영동에 문충사(文忠祠)를 지어 동생 송병순과 함께 배향하였다. 문충사는 1970년 대전 용운동으로 이전하면서 용동 서원(龍洞書院)으로 이름을 바꿨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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