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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500349
한자 東學 農民 運動
영어공식명칭 Donghak Peasant Revolution
이칭/별칭 농학난,동학 농민 전쟁,갑오 농민 전쟁,동학 혁명,갑오 농민 혁명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무주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이선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94년 1월 - 동학농민운동 발발
전개 시기/일시 1894년 3월 - 동학농민운동, 농민군 지도부가 중심되어 무장기포 발발
전개 시기/일시 1894년 4월 27일 - 동학 농민군 전주성 함락
종결 시기/일시 1895년 1월연표보기 - 이응백의 처형으로 무주의 동학농민운동 종결
성격 민중 봉기 운동
관련 인물/단체 이응백

[정의]

1894년 전라북도 무주 지역을 포함한 전국에서 동학 교도와 농민이 일으킨 반봉건, 반외세를 지향한 운동.

[역사적 배경]

1860년 최제우(崔濟愚)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인내천(人乃川) 사상을 주장하며 동학을 창시하여 전라도를 비롯한 삼남 일대의 농민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876년 일본과 불평등한 근대 조약,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강제로 개항한 이후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경제적 침투가 심화되었고, 동학의 개혁적 사상을 받아들인 농민을 중심으로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 아래 체제 변혁을 요구하는 함성이 커졌다.

[경과]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1월 고부 농민 봉기를 시작으로 전라도를 발판으로 조선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동학농민운동의 발원지라고 할 수 있는 고부, 정읍, 고창, 무장 등에 비해 동부 산간 지대인 무주, 진안, 장수 등지의 농민군의 활동은 지역적 편차가 있었다. 동학농민운동과 관련하여 무주 지역에 대한 기록은 1893년 초 충청도 보은 집회의 전말을 수록한 어윤중의 『취어(聚語)』에서 확인된다. 전라도 함평, 남원, 순창, 무주, 태인, 영광 등지에서 200여 명이 참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보은 집회에 참여하였던 무주의 동학 교인이 1894년 3월 봉기에 적극 참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894년 3월 전봉준(全琫準), 김개남(金開南), 손화중(孫化中) 등 농민군 지도부가 중심되어 일으킨 ‘무장기포(茂長起包)’에 무주의 이응백(李應白)[1859~1895]을 비롯하여 윤민(尹珉), 갈성순(葛成淳) 등 무주의 농민군 지도자들이 ‘장령격(將領格)’으로 참여하였다. 이응백은 무주 적상면 출신으로 본관은 여주, 본명은 형택(馨澤)이다. 『적성지(赤城誌)』속지(續地)에 의하면, 그는 무주 군민의 봉기를 촉구하며, “오늘날 탐관오리나 양반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은 모두 자신을 살찌게 하는 데만 뜻을 품고 백성들의 고혈을 착취하여 주민들이 도탄에 허덕이고 있다. 이에 본인이 마땅히 선두가 되어 그 괴수들을 숙청하고 괴롭고 어려움에서 헤매는 민족을 구출하고자 하니 내 뜻에 따르기를 원하는 자들은 즉시 궐기하라.”라는 내용의 통문을 작성하였다. 이응백은 통문을 발송한 다음날 무주 관아를 점령하였다.

동학 농민군은 백산 대회 이후 고부 황토재에서 전라 감영군을, 장성 황룡촌에서 경군을 격파하고 4월 27일 전주성을 함락하였다.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은 청과 일본의 개입을 계기로 정부와 화약을 체결하고 각 군현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운영하기로 합의하였다. 무주 관아를 점령한 농민군 역시 집강소를 설치하여 집강소를 통한 민정(民政)을 시행하였다고 한다. 농민군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응하여 무주 지역의 유림을 중심으로 수성군(守城軍)이 결성되었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을 축출하기 위해 농민군이 9월에 재봉기하자 무주 지역에서도 이응백, 무풍면의 문성술(文成述)이 봉기하였으며 무주군 유가면에서도 호응하였다. 9월 재봉기 이후 무주 농민군과 수성군은 여러 차례 충돌하였다. 특히 무풍 수성군의 적극적인 공세로 무주 농민군은 무주군 무풍면을 장악하지 못하였다.

[결과]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10월 10일경 북상하였으나 무주 농민군은 북상하지 않고 무주에 남아 있으면서 경상 감영이 있는 대구 방면으로 진출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무주 농민군은 대구가 아닌 전라도 용담현을 공격하였다. 이후 전봉준, 손화중의 주력 부대가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하고 후퇴하였고, 후퇴하던 손병희(孫秉熙) 부대가 태인 전투 직후에 임실에 들어왔다가 장수 장계를 가던 도중에 관군과 민보군과 접전한 끝에 금산을 거쳐 무주읍으로 들어왔다. 무주읍 장백리(長白里)에서 민보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며칠 무주에 머물다가 떠났다. 손병희 부대가 무주를 떠난 이후로 무주에서 더 이상 농민군의 활동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리고 1895년 1월 무주에 관군이 들어와 무주 일대를 수색하여 농민군의 지도자 이응백을 체포하고 장터에서 처형하였다. 무주 지역의 농민군을 이끌었던 이응백의 처형으로 무주의 동학농민운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반봉건과 반외세의 동학농민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무주 지역의 동학 농민군의 활동상과 수성군 등 지역적 대응을 통해 동학농민운동의 구체적 실상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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