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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500142
한자 貢進里
영어공식명칭 Gongjin-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공진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명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연표보기 -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공진리 개설
성격 법정리
면적 9.04㎢
가구수 188가구
인구[남/여] 358명[남 171명/여 187명]

[정의]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공진리(貢進里)는 고려 때의 명신인 김신(金侁)의 고향으로, 김신이 왕의 추천[貢]을 받아 원나라에 나아가[進] 큰 벼슬을 얻었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일설에는 국가에서 김신에게 땅을 내려주고 지방민이 국가에 바칠 공물(貢物)을 그 후손들에게 바치게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도 한다.

[형성 및 변천]

김신은 고려 고종(高宗) 때 사람으로 원나라와의 국교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에 1304년(충렬왕 31) 김신의 고향인 진례현(進禮縣)을 금주군(錦州郡)으로 승격하고 지금 주사(知錦州事)로 임명하였다고 한다. 그때 공진동이 금산에 속하여 기록에는 금산(錦山) 사람으로 소개되어 있는데, 김신과 관련된 지명은 지금도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공진은 1674년(현종 15) 무주 도호부(茂朱都護府)에 편입되어 일안면에 편제되었고,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무주군 안성면 공진리로 개설되며 공진 1리와 공진 2리로 나뉘어졌다. 1972년 공진 1리의 공진과 마암이 각각 분리되고, 주고와 신월이 같은 마을로 묶이면서 주고로 개칭되었다. 공진 마을, 신촌 마을, 주고 마을, 신월 마을, 보안촌 마을, 마암 마을 등 6개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환경]

공진리는 무주군의 최남단에 위치한다. 북쪽에 위치한 매방제산[776.1m]의 한 능선이 남쪽으로 뻗어 있고, 동쪽으로는 무룡산[1,492.1m]의 봉우리인 시루봉 서쪽 일부를 포함하고 있다.

[현황]

공진리는 동북쪽은 무주군 안성면 죽천리, 서북쪽은 무주군 안성면 진도리, 남쪽은 전라북도 진안군 계북면 원촌리, 서쪽은 전라북도 진안군 동향면 학선리와 접한다. 2017년 1월 현재 면적은 9.04㎢이며, 공진리, 주고리, 마암리의 3개 행정리에 188가구, 358명[남 171명/여 187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매방제산의 능선 아래에 무주 안성 컨트리 클럽이 위치한다. 리의 중심으로 국도 제19호선과 통영 대전 고속 도로가 남북으로 관통한다. 김신의 초혼 장지(招魂葬地)와 함께 오래전부터 김신의 후손들이 살면서 건립한 영모재(永慕齋)가 있다. 김신의 묘소는 일제 강점기인 1924년 장수-무주 구간의 신작로를 낼 때 묘비와 유품들이 나오면서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고, 그때 유품들을 수습하고 성분(成墳)한 후 묘역을 정리하였다. 김신의 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김신은 임금의 천거로 원나라에 들어가 공을 세우고 요양행성 참정(遼陽行省參政)에 이른 후 고국에 돌아왔다. 그때 우리나라는 왜구의 침입으로 혼란에 빠졌는데, 김신의 어머니도 왜구에게 살해당하였다고 한다. 이에 김신은 모친의 유해를 찾으려 하였지만 당시 희생당한 시신이 너무 많아 유골을 분간조차 할 수 없었다. 이에 김신은 쌓여 있는 유골들 앞에 제단을 쌓은 후 7일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늘을 향하여 통곡하며, “이 많은 유골 중에 모친의 유해가 있다면 색깔이라도 변하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맑은 하늘에서 뇌성벽력과 함께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고, 유해 한 구가 파란빛으로 변하며 ‘고려국 대효자 김신지 모골야(高麗國大孝子金侁之母骨也)’라는 글씨가 나타났다. 이에 김신은 모친의 유골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르고 원수를 갚고자 결심하였다.

김신은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황제에게 간청하여 정동군(征東軍)에 참여하였고 일기도(一岐島)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노도와 같은 풍랑을 만나 군사들이 탄 배가 침몰하려 하자,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져 파도를 잠재우고 군사들이 무사히 귀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후 나라에서 김신의 시신을 수습할 수 없게 되자 그의 혼이라도 달래기 위하여 고향인 공진동 양지바른 언덕에 장지를 마련하고 혼백을 묻고 초혼장(招魂葬)을 치르게 되었다고 한다. 김신의 충절을 기리고자 금산의 성곡 서원(星谷書院)과 황풍사(皇風祠), 안성의 죽계 서원(竹溪書院)김신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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